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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 GOTAN PROJECT - La Gloria (official video) : http://www.youtube.com/watch?v=FFzk_MX1D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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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an Project의 Tango 3.0 album, 예전 앨범에서야, 처음 음악을 접하고 이들 음악 스타일에 강한 충격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계속 비슷한 스타일의 앨범의 반복될수록 음악에 대한 신선도는 떨어진다.
하지만 워낙 Style로 승부하는 이들이라 역시,
영상과 함게 보면 Impact가 강하다.
예전 음악들도 영상과 같이 보면서 다시 좋아하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
2010/07/27 16:17 2010/07/2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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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bi No Neiro(Tone of everyday)
Artist: NAKAMURA Magico / NAKAMURA Masayoshi / KAWAMURA Masashi / Hal KIRKLAND(Japan / Australia)



2009 제13회 일본 미디어 아트 예술제의 엔터테인먼트 부분 대상작품인 뮤직비디오이다.
게임 등이 수상해왔던 엔터테인먼트 부분에 왜 뮤직비디오가? 라고 생각할 수 있을텐데
작품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Uniqlo나 무인양품의 PR과 비슷한 맥락이있어 일본적인 느낌도있지만
요즘은 low tech를 이용한 개성있는 작품에서 Creativity가 빛을 발하는 시점이다.

작품개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음.
- SOUR 밴드의 노래가 호소하는 “다양한 가치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문명의 이기가 아무리 진화해간다고 하더라도 변함없을 것이다. 많은 분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웹카메라로 촬영한 소재를 편집함으로써,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느낌을 간결하고도 즐겁게 표현해낼 수 있었다.


 

2010/01/21 11:46 2010/01/21 11:46
태그 :

Kinetic arts 1 Through R's eyes

요즘 프로젝트로 Kinetic art관련 자료를 찾고있다.
짧은 리서치로 Motion과 Object사이의 시적인 결합이 들어있는 작품을 찾아내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그러나 이는 Motion자체가 시각을 압도적으로 흡수하는 부분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작가 입장에서는 좀 더 멋진 Motion을 찾는 방향으로만 발전하게 되고
관객입장에서도 시적 긴장보다는 당장 시각을 압도해 버리는 감탄에 젖어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Motion은 독이다.

그러나 움직임은 독이라 보기에 너무 매력적인 자체이다.
Motion에도 홀려버린 나를 보며, 솔직히 TV앞에 정신홀린 아이처럼 우선은 사탕의 단맛에 빠져버리는게 싼 미감 같기도 하고, 인간 인지 체계가 그렇게 발전한 탓이겠거니 싶기도 하다.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이 포스팅은 키네틱 아트의 시초 모빌이 현재 어떤발전을 하고있는지 간략하게 알리기 위한 포스팅이다.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고려페인트 광고의 도미노가 생각난다. 도미노의 쓰러지는 속도감 자체에 눈을 때지 못하던 것 말이다. 또 줄리앙 오피의 걸어다니는 사람 LED도 생각난다. 그 작품을 본이후로 그의 간략한 드로잉이 얼마나 모션을 잘 잡아내고 있는지 볼때마다 놀랄뿐이다. 하여 나는 움직이는 gif애니메이션으로 핸드폰에 저장까지 했다! 이후 서울역에서 크게 전시할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렇게 나는 움직임 자체의 매력에 매료되어있으면서도 막상 Kinetic art 작품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다.
키네틱아트는 본격적으로 움직임의 아름다움에 뛰어드는 것이다.
마침 YouTube 검색이 가능해지면서 상당 수의 Kinetic art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프로젝트관련 하여 찾아야 하는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특이한 소재의 움직임을 소개하는 인상적인 모션들을 소개하고, 저장하기 위해 포스팅한다.

나중에 보고서 쓰면서 2탄으로 짬이 나면 원래 조사해야 했던 적품도 소개하면 좋겠다.

+ 제목을 클릭하면 링크로


사족: 취향이겠지만 동영상에 삽입된 음악은 끄고 모션에 집중하는편이 낫지 않나 생각해보기는 한다.
2010/01/20 02:52 2010/01/20 02:52



삶이 잠깐 반짝하는 순간이 있다.
이를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수 년의 무의미한 삶은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순간은 어떤 조건을 가지는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만하지 않은가?
요즘 그런 생각이 머리를 기어다니고있다가
우연히 지영누나의 소개로 이 동영상을 보았다 (그 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삶의 열정과 순수함이 오로지 무용(Useless)을 위해 분출되는 순간
그저 이유가 있다면 겨우 충만함? 이라는 것?
오!! 그 많은 미친 짓도, 그 많은 비 합리성도 하나의 시도로써 이유를 가지게 된다.
그 추함 속에 인간이있다.

얼마 전 8월이 살짝 시원해 지기 시작하던 저녁 평일에 효자동인지 통의동인지 골목을 헤메다가
메리아스를 입고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아마도 대머리 아저씨가 봉숭아 화단에 걸터 않아
기타를 치는걸 보았다. 간간히 노래도 하시고...
골목을 접어드는 순간 그분의 아우라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았다.

얼마 전 베를린에 다녀온 은영누나의 말에 따르면
일요일마다 베를린 공원에 노래방 장비를 들고 나타나는 오스트리아인 아저씨가 있는데
이 장비를 사용해서 노래를 부르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일반인들이 꽤 되며 상당히 열정적이란다.
게다가 사진 속 관객 수는 어마어마한 수준

노래라는거, 음악이라는거, 예술이라는건 무용함에 가치가 있었다.
노래방이 아닌곳에서, 혼자 신나게 노래를 보르는 사람을 본게 언제였을까
게다가 가끔의 순간을 술의 힘을 빌려 자신이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니 비극이다
사무실, 연구실에서 하루동안 프리젠테이션 순서를 기다리며 발표를 하다가,
노래방에가서는 노래도 순서대로 돌아가면서하고 다 사교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이러져버린다.

정말 드럽게 못하는 노래, 엉뚱한데 쏟아붇는 미친놈의 열정이 그리워졌다.
Banksy 같이, 정말 죽을 힘을 향해 꽃을 던지는 것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른 아티스트들의 '일상 뛰어들기'랄까? 좋은 프로젝트인듯하다. http://www.blogotheque.net/
2009/09/25 22:18 2009/09/25 22:18
태그 : , ,
항상 뻔한 이야기가 그 보편성 때문에 눈에 안띄다가, 막상 필요한 상황의 사람에게 새삼 공감을 불러오곤한다.
대학원을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었고, 우리세대에서 대학이란 취업을 위한 관문이었고 그것으로 평가받았기에
가끔 애초에 원론적인 전공을 가지고있으면 어땠을까 싶어진다. 수학 물리학, 미학, 철학, 심리학 등
요즘시대에 새로운 분야의 융합과 깊이에의 강요에 시달리는 것은 유독 CT사람들 뿐이 아니라 생각한다.

다중지능으로 유명한 하버드의 교육학자 하워드 가드너의 책이 나온모양이다. 요즘 젊은 사람에게 들려주는 이 대가 할아버지의 일반적인 이야기에 따득한 정과 대가의 고찰이 느껴지는 내용인듯 하다.

Mind를 어떻게 훈련시키는가라는 어찌보면 서양의 과학적 방법론과 물질론이 동양철학을 만난 것 같은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5단계로 이어진다.

1. The disciplined mind, to learn at least one profession, as well as the major thinking (science, math, history, etc.) behind it - 어찌보면 순서가 1이 먼저겠지만 나의 경우 2부터 추구하면서 1에대한 뿌리에 대한 갈구에 목마른 사람이다. 그것이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믿긴 하지만, 여전히 깊이에 대한 강요로 스스로 채찍질 중이다. 새로 만든 뿌리인 인지신경과학은 그런 면에서 바른 방향으로 뻗은 뿌리가 아닐까 싶다. 갈길도 멀지만.

2. The synthesizing mind, to organize the massive amounts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e effectively to others - 어떻게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벽을 쌓지 않고 융합 할 수 있을까? 방대한 양의 정보, 정말 공감하는 바이다. 일전에 올렸던 읽어야 하는 것들에 대한 갈증과 언어 장벽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와 맥을 같이한다.

3. The creating mind, to revel in unasked questions - and uncover new phenomena and insightful apt answers - 궁극적으론 이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R.Florida나 메디치 효과에서 이야기되어왔듯이 창조의 기반은 융합에서 나오는 시대라 생각한다. 그러나 가드너는 여기에 두 가지를 더한다.

4. The respectful mind, to appreciate the differences between human beings - and understand and work with all persons

5. The ethical mind, to fulfill one's responsibilities as both a worker and a citizen

이러한 5단계의 mind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를 찾고 전문성과 인간성을 모두 고려한 판단을 할수 있을것이라 한다. 5번이 내용은 우리에게 공자를 떠올리게하여 뭐 익숙한 개념이잖아? 라고 넘어가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요즈음의 시대에 정말 4,5의 내용을 생각하면 숙연해지는 부분이 많다고 본다. 성숙한 시민, 성숙한 학자가 어때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또한 2에서 계속 부딛히는 경우가 많은 나에게 있어 4의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보인다.

2009/09/09 13:16 2009/09/09 13:16

 최근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지만 한편으로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불편해 보이기도 한다. 내 마음이 청개구리의 마음인지, 인터넷 글들에서 원초적 인간의 욕구를 포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이야기들이 홍수를 이루는 것 같다.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던 것이 너무 당연시 되었기에 굳이 이야기 할 필요도 없었던 선조들이 생각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또한 먹는 것에 집중하다 뭔가 놓지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미식가라 하면 탐욕스러운 식탐을 채우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 부정적 이미지가 상상된다. 그러나 미식견문록을 다 읽었을 때 요네하라 마리가 말하는 이 견문록은 삶을 이야기 하는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외국에 나가있어야 했던 경험과, 러시아어 동시동역사로 일한 경험 속에서 그녀에게 음식이란 각 문화와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식이었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자신이 먹기 위해 사는 사람에 속한다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 하고 있다.

 
기행문은 여행지의 간접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결국 독자들이 얻는 것은 여행자의 개인적 삶에 대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모두 먹어본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흥미가 없을 것이고, 아무도 모르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또한 공감을 불러오기 힘들다. 그 것이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 등장할 때 우리가 놓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를 통해 보기 때문에 여행이든 음식이든 소재가 등장하는 것 못지않게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배어든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매력적인 인간성은 좋은 견문록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결국 이 책의 이야기 들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도 되는 미식견문록이라는 면에서 요네하라 마리가 뛰어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별미를 찾아 다니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닌 매일의 식사 속에서 혹은 문화에 녹아 든 음식을 소재로 삶을 이야기 한다.

 

이 책은 크게 3악장 음악의 형식을 빌려 재미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우선 일본인으로 바라본 러시아 음식과 문화를 이야기한다. 러시아 음식이야기는 결국 그 인접국가인 유럽과 중앙아시아와 까지 퍼져나가게 되는데 새삼 일본과 러시아 모두 우리의 인접국가임을 깨닫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고 받은 영향이 많음에 놀라게 된다. 둘째로 우화와 동화 속에 다루어진 음식을 소재로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 문화적 배경 이야기 하는데 기본 소양으로 가지고 있는 그녀의 폭 넓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습관이 된 깊은 사색과 통찰력이 빛난다. 마지막 3악장은 그녀의 가족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음식과 가족에 대한 따뜻한 동양사람들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요네하라 마리의 글을 읽어가며 문화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때로 식성만큼 보수적인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식탁을 보면 어느새 최근에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레시피부터 언제 들어왔는지 조차 까마득하여 우리 식 자재로 당연시하고 있는 것들도 많다. 그것은 세계의 어떤 곳도 마찬가지다. 문화는 포용하는 것이 특성이다. 문화를 이루는 추상적인 무리의 개체들에게 전달되며 통합되는 방식으로 자신을 전파하고 변형된다.

 

 세계미술시장에서 중국 현대작가들이 연일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고, 일본 작가들은 이미 자리를 잡았다. 음식도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아시아는 중국, 일본 그리고 그 밖의 나라들로 인식이 된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이 들과 구분될 수 있는 한국만의 특징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마다 결국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문화를 경쟁력을 가져야 할 마케팅 수단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문화에 어울리지 않는 엄격한 지워나가는 척도를 적용해 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 아닐까 반성하게 된다. 우리만의 것을 찾으려 했던 문화에 대한 환원주의는 기본적으로 문화의 탄생 방식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는 경쟁관계에 있어 우위를 점령하는 무엇이 아니다. 우리 문화가 뛰어나다고 소리쳐 봐야 다른 문화권의 사람에게는 전제주의적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다. 다른 문화를 그 사람들만큼 사람하고 포용하는 타인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그 타인의 시각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문화에 관심을 가진다. 요네하라 마리는 책 속에서 러시아를 이야기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일본을 녹여 내고 있고, 그녀조차도 생각하지 않았던 각 독자들의 개인적 경험과 만남으로써 따듯한 무언가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문화와 뿌리를 찾아 자랑스러워 하려는 노력이 어찌 보면 힘겹게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의 위로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을 통해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매일의 먹거리 하나를 이야기 하더라도 깊은 문화적 소양을 바탕으로 깊은 사색을 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해 보게 된다. 오히려 거대 담론을 만들고 철학을 구성하는 것보다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상의 철학이 등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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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8 15:46 2009/07/18 15:46


 'Synecdoche, New York'을 구상하는 Kaufman을 떠올리며 간혹 웃기도 공감하기도 지독한 외로움과 병에 같이 아프기도 했다. 따듯하게 뒤집은 혹은 인간에까지 적용한 끔찍하게 응용한 버젼의 시뮬라르크가 느껴졌다. 지독하게 외롭고 따듯하고 세심한 영화지만 말코비치되기나 어뎁테이션 때 보다는 영상이 주는 매력이 좀 약하다. 영상으로 스스로 말하기엔 너무 세심하신것은 아닌지? 그리고 Kanevsky의 그림이 좋았다. 어떤 인연으로 그의 그림이 쓰인 것인지 궁금하다. 참 제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잘 지었다.

 'Boy A'가 나름 논란적 문제를 사회에 던진다고 하는데(포스터에 보면) 물론 표면적으론 이해하지만 결말을 그렇게 처리해서 그런 것 아닌가? 결말 부분에서 오히려 이야기가 시작되어도 될 듯하니 논쟁이 생긴 것 인듯. 하지만 영국의 매력을 잘 살린 자연스러운 영상 화법은 참 좋았지만 깨끗하기만 하려고 했는지, 영화스럽게 가끔 지지부진하게라도 끌고가는 힘이 들어갔으면 어땠을지 그래도 그 화법덕에 오랜 영화 감상 기피증을 벗어났으니 영화기피증 환자에게 치킨스프 같았달까

 'Sa-Kwa'의 매력은 누구에게나 내얘기잖아?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데 있는것 같다. 여기저기서 자기이야기라는 평들이고 나또한 많은 부분에서 속을 들킨것 같았으니, 그렇다면 사랑이 이런것인지 혹은 우리세대 혹은 사회의 구조가 그런것인지 아직 사랑이 너무나 어려운 나에게는 궁금증을 준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처럼 '정말로 노력해보면', 그의 말처럼 '나보다 널 사랑 할 수 있을까?' 뭐 그건 너무 주제를 파고든 감상인듯 싶고, 전반적으론 대화가 없는 장면들의 배우의 연기에서 온갖 공감능력이 발동되어 좋았다. 눈하나 감는 시점 마져그리고 사랑을 따로 떼어넨 것이 아닌 삶 속에서 혹은 오롯하게 또렷하게 즉시하게 만든다는 점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시대를 고려해서 평가한다면'이란 가정은 엄밀하게 과거의 후광을 씌워 지금의 조금 낮은 평가를 올려 보겠다라는 (까칠하게 보면) 것이니 별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며 진부하지만 어쩼든 'Pi'를 만든 Darren Aronofsky는 98년에는 정말 눈이 불타는 '앞날이 유망한 대단한 젊은이'였었던 것은 누구나 얘기하듯 동의하게 된다. 그 이후 Requiem도 젊은 영화인의 시도로만 봤었는데 음, 새로 보인다. Wrestler를 어떻게 만들었길래 말이 많은지도 기대가 된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본 Pi의 그의 시도는 이제는 너무 대중적이고 일반화 되어 친숙해져 버린것은 아닌가 싶어지는 만큼 (심지어 발칙했던 그의 주제마져 TV드라마 속에서 너무 등장해버려 진부해졌다.) 너무 대중적이어도 여전히 너무 '그'같아도 실망할 것 같기도 하다. 대체 나는 왜이리 까칠한 관객인걸까

 신기하게 이번 주말엔 요새 영화가 봐진다.
외국 드라마 보게 되느라 영화가 한동안 눈에 안들어왔었는데 이유를 생각해보면 드라마도 한동안 안나올듯 싶고 좋은 영화도 많고, 막상 본 영화들을 보면, 요즘의 극적 현실보다 더 리얼리티를 찾고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예전 단편영화 찾아보던 때같이 영화의 한두시간짜리 플롯과 구성의 매력을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영화 계속 보게되는것도 오랜만, 보려고 생각한 영화가 쌓이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는데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회이길

그나저나 덥수룩하던 머리를 시원하게 잘랐다.
봄날의 닭을 컨셉으로 애매한 짧은 길이이길 바랬는데, 두상 탓인지 매번 짧은 머리는 '너무' 건강해 보인다.
급작스레 허리를 다쳤다가 회복한 학교 달리기 대회 중, 머리가 너무 더웠는데
막상 자르고 러닝머신에 올라가니 머리가 없어 땀이 다 얼굴로 쏟아진다.

허리를 다쳐 취하는 약을 먹으며 거의 대부분 누워 지냈는데 아픈 것 빼면 생각보다 좋았다.
일상의 리듬을 나른하게라도 깨버리게 되어 오히려 새롭게 24시간을 구성하게 되었다.
세상을 너무 세밀하게 선명하게 보고 살았었나 싶었는데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 어찌들으면 위험한 발언이지만 편안해 지기도 한다.
술도 담배도 몸에서 허락되지 않으나 가끔씩 약(치료용도로 받은 감기약 같은 것)은
의외로 만족감을 주니 해외 나가면 아예 입도 데지 말아야 할 체질인가 보다;
더하기를 추구하면 슬프지만 조금 빠진 상태가 되면 일상이 새로 보인다.
지금의 삶의 과잉된 에너지를 다른 곳에 써야겠다는 진단이다.
스콧 니어링의 하루 시간을 구분하여 쓰는 지혜가 계속 생각난다.

2009/05/24 22:27 2009/05/24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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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
네이버에 소개한 어느덧 4번째 책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요새 좋은 책을 구해 읽을 시간이 많이 없었다.

오늘은 푹 삶아진 파스타 처럼 늘어졌다가, 내일은 서점에도 나가봐야겠다.
이책을 읽으면 초반엔 뉴욕 밤거리의 열기가 느껴지고 후반엔 이탈리아의 햇빛이 느껴진다.

요새 따듯한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학교는 2월에 개강을 하여 북적거리고있어 마치 봄이 늦게 오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얼른 봄이 와서 날이 따듯해졌으면 좋겠다.

좋은 책 있으면 누구든 소개해주세요.
2009/02/07 17:11 2009/02/07 17:11
태그 :

Baader Meinhof Through R's eyes

from '68 Baader Meinhof Gang

'88 Gerhard Richter, Baader-Meinhof Series,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USA


About, Revolution, injustice and .... oblivion



Gegenüberstellung 2 (Confrontation 2), 1988, 112 cm X 102 cm, Oil on canvas, Catalogue Raisonné: 671-2



Erschossener 2 (Man Shot Down 2) 1988, 100 cm X 140 cm, Oil on canvas, Catalogue Raisonné: 669-2

Der Baader Meinhof Komplex, 2009
2009/01/29 20:30 2009/01/29 20:30
태그 :

박사자격시험을 공부중에 예전 레포트들을 뒤져본다.
문화기술이라는 분야를 다같이 생각해보고 견해차를 좁혀보자는 개론과목에서
거의 마지막 숙제로 '문화기술학의 풀리지 않는 10가지 문제'를 자신이 제시하는 숙제가 있었다.
한 학기 지내보니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하는 숙제가 되었던 사람도 있었다.
CT라는 학문 분야를 CT대학원 내의 문제로 생각한 한편 교수님과의 대화가 필요했던 이유였다.
이후 이 과목에서는 이 숙제를 과목 초기에 내는 것 같다. 한번 고민해보고 같이 시작하자라는 취지 이신 것 같지만 덕분에 나는 1학기동안 숙성된 그러면서 상당히 풋내 가득한 글이 나왔다.  
지금으로 부터 3년전 그러니까... 학번이 05인 석사 첫학기 시절에 쓴 내용이다.
뇌는 커녕 미술에 대한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던시절이었는데
혼자 고민이 많았던 그리고 그 고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싶다.

언뜻 지금은 10개가 뭐야 100개는 만들어 내겠다 싶다가도 하나하나 고민해서 만들었던 열정을 유지하고있는가? 라고 자문한다.

more..

2008/12/10 15:40 2008/12/10 15:40

Conversation Through R's eyes

사람이 그리울 때 운이좋아 막상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 얼굴을 마주하고있으면서도 지루해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땐 머리속으로 어떻게 이사람과 헤어질까 하는 생각만으로 가득해서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는다.
인스턴트적이고 소비적인 시선으로 사람과의 만남을 바라보는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 대화 혹은 교감을 하기에 인간이 필수 대상인 것은 아닐것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대화의 상대로써 인간을 배제하지 않으면 되는것이지 인간만으로 국한될 필요는 없다는 것

Keith Jarrett 연주에서 그의 표정을 보면, 청각적 정보 이상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고 믿는데
그의 표정이 함축하고있는 음악과 실제 연주되는 피아노 소리가 합쳐져 새로운 음악이 들린다.
내생각에 그는 분명히 속으로 노래를 하고 있는데 (그의 연주를 들으면 가끔 신음(?) 소리가 흘러 나오기도한다)
각 곡의 감성을 한껏 끌어올려 그의 내면에서 풍부하게 소리가 이끌어져 올라왔을 때
최정점에 도달한 음에만 실제 피아노 소리를 얹는것을 허락한다.
그런면에서 그의 사운드만으로는 족적만 남은 미니멀리스트의 작품같아 보인다.
결국 들리지 않는 부분의 매력인것이다.
들리지 않는 부분이 그의 음악을 자꾸 찾게 만들고
그의 얼굴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빠질 때, 입의 씰룩거림에 동요하게 될 때!
혹여나 그가 어쩔줄을 모르고 일어나게라도 되면! 아~ 마음이 같이 어딘가로 떠나가 버리는 것이다.
사실 그의 표정은 너무 힘이 들어간것 같이 보이기도 하다가,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손자를 앉고 얼레느라 어쩔줄 모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피아노에, 그 곡 자체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대하고있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예술가들라면 자고로 깨끗하고 정갈한 결과와 병행하는 그런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흘러넘침이 척연덕스럽게 등장해줘야 하는것 아니겠는가?
예를 들면 Jackson Pollock의 그림을 보며 그가 그 위에서 춘 춤을 생각해보면(액션 페인팅은 거의 광란의 춤으로 볼수 밖에 없지 않을까? 거의 무당의 굿 수준이다.) 그 개인의 공간에 침입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개지면서도 결국 천연덕스러움에 감동 받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예술가에게 허락된 퇴행(?)인건 아닐까.

Jarrett을 보면서 그는 분명 온몸으로 피아노와 소통하고있고, 또한 피아노로 곡과 혹은 아주 오래 이 민요가 만들어졌을 때와 대화하고있다고 믿어졌다.
일명 '텍스트'의 선형적 행태로 '누군가'와 소통하는데 질려버릴 때 우리가 소통할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며 적어도 커피빈과 바리스타의 대화를 엳들으려 노력하고, 로스터의 의도속에서 애초의 그린빈이 숨겨온 자연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추측해 보는 재미를 가지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현실적으로 큰 달을 보았다.

아... 정말 큰 달이다. 이렇게 큰 달을 본적이 있었던가? 자동적으로 달의 인력이 떠올려졌다.
결국 저렇게 먼거리에서도 자신 존재의 무게만큼 그는 나를 끌어당긴다. 나도 마찬가지일테고,
그렇게 달이라는 우주적 존재를 통해 무수한 영겁의 과거속에 우주적 시간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인간에게 허락된 생각의 규모는 자유로우니까

2008/10/18 21:23 2008/10/18 21:23
9월의 시작부터 운이 좋다.
아무생각없이 방문한 네이버의 섬네일에서 내가 전에 리뷰했던 도서의 표지가 눈에 익었다.
원래 리뷰어들이 모인 카페에서 미리 '언제 당신이 소개하는 책이 나옵니다.' 하고 알려주기 마련인데
매 번 깜박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는데 재미가 쏠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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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리뷰를 처음 했던 책인데 이제 올라왔다.
서점에서 훓어보다가 바로 사버리고 그 날 밤에 읽고 또 다음 날 대전 가는 기차에서도 읽었던 책이다.
대학원 초기에 힘들었던 시기에 큰 힘이 되었던 책이라 지금도 가끔 열어보게 된다.
인간이란, 학자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많이 배웠다.
그리고 Innovation! 매일 매일 들어 너무 익숙해져버린, 하지만 익숙하기에는 귀한 가치!
원래 건축을 막연히 좋아했는데 이 책을 읽고 건축이라는 분야를 아름답게 만든 건축가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2008/09/02 02:33 2008/09/02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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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DA Through R's eyes


PRADA Trembled Blossoms

2008/07/28 10:00 2008/07/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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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 Kakkinen Through R's eyes

장마가 되면 모든 것이 축 쳐진 빨래처럼 무겁고 닳아 버린것 같이 느껴진다.
인간 관계도 오래되다 보면 어디서 부터 실이 엉켜버린건가 싶다.
요새 같아 선 불가능한 일이 하고 싶다.

인생에 있어 어떠한 부분을 삭 오려내고 하나하나 이해 되고 용납 되는 것만 다시 올려 놓고 싶다.
일종의 서랍 정리라고 할까 그렇게 되면 눅눅한 일상도 보송보송 해질 것 같고, 머리속이 깨끗해 질것만 같다.

Ari Kakkinen의 사진을 보면 이런 일이 완전 불가능한것은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
삶을 스틸 사진으로 찍어본다면 찍힌 대상 하나하나에 따라 아마 무게감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하나씩 지우고 보면 조금 더 객관적인, 본질적인 무게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하얀 눈을 좋아하는게 아닐까?
장마라 건조하고 하얀 겨울이 생각날 때 핀란드에서 온 사진들을 감상하며 위로해 본다.

"The gesture of sous rature ("putting under erasure") implies "both this and that" as well as "neither this nor that" undoing the opposition and the hierarchy between the legible and the erased."

Jacques Derrida: Of Grammat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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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1 01:36 2008/07/21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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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et art by JR



1.

게릴라 형식을 취해 사회에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방식으로써의 예술
사회 참여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하고도 가벼운 방식의 대답으로 보인다.

회화나 사진이 아닌 행위예술의 개념으로 보는것도 재미있어 보인다.
등장하는 인물과, 이를 붙이는 사람과, 지우라고 시키는 사람과, 지워내는 사람들의 입장과, 지워내는 사람을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리고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미지는 말한다. 얘기를 듣고 있으면 시간가는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그럼 예술이 된다고 생각하고있다. 아직 덜 익은 정의겠지만 말이다.

2.
의견 표출에는 폭력성이 있기 마련이지만,
상대방을 조금 이해하고 대화하려 한다면 그 폭력성이 점점 커지지는 않을텐데
뭔가 거대 담론, 대의의 무서움을 실감하고있는 요즘 의견을 낸다는 것에 대해
어렵다...

+ 단순히 권력에의 저항등의 의미로 올린 포스팅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야 할 것 같은 시점이라
2008/06/02 22:40 2008/06/02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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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osmit.it


밀라노 가구 박람회 사진 중 눈이간 몇가지들 (위 홈페이지에서 발췌)

보기



건축, 인테리어를 보는 나의 관점은 그 것이 나의 생활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생각해 보는 것에서 비롯한다. 아름다운 디자인은 어렵지만 사실 디자인의 과잉 시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정말 무릎을 치게 하는 디자인, 생각해볼 디자인은 사용되는 모습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말 좋아서 집 밖으로 나가기 싫게 만드는 집 보다는 생활을 즐길수 있도록, 날시가 좋다면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집이 더 좋은 집일거라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 사진들은 내 일상을 넣어보고 재미있는 몇장들이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2008/05/27 14:39 2008/05/2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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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sitor: Trailers, April 11th, 2008
Smart people:
Trailers, April 11th, 2008
Wall.E :
Trailers, June 27th, 2008

2008/03/01 16:11 2008/03/0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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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겨내지 못할거야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
from The Darjeering Lim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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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 결국엔
서로 소통한다는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전하려는 소통하기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상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잠시동안 그 사람의 영혼과 교감한 것 같은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귀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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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1 14:09 2008/03/01 14:09
...
실수 했다는걸 인정합니다 물론, 좀 큰 실수죠.
떨쳐버릴겁니다.
죄책감을 느끼며 영원히 마음 속에 묻어 둘 수는 없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질 않으니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돌아가
내게 있는 악마같은 녀석과 정면으로 맞서야합니다

또 냉정함을 잃어 그른 선택을 했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놓쳤죠
하지만 다시 바로 잡을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때부터 저는 똑똑하고 싶었습니다
선천적으로 똑똑한 사람도 있고, 원래부터 잘생긴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해당되지 않죠. 때문에 부단히 노력할겁니다.
노력 해야 합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갈 것입니다.
인생은 올바른 답을 알고 있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from movie 'Starter for ten'
2007/08/15 23:08 2007/08/15 23:08

밀양 Through R's eyes

요새 영화에 통 관심 기울일일이 없었는데
떠밀리듯 간 극장에서 밀양의 끝 크레딧에 원작이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더라
천년학, 밀양 ... 우연히 이청준의 이야기들이 2007년에 같이 영화화 되었다.

이청준..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문학가다.
내심 이 분 이야기에 푹 빠져 보려고 다짐만 했었는데

나날이 지치다가
요새 소설이 한 두편 눈에 들어오고 ...
휴가지에 두꺼운 책 가져가 마음의 짐과 함께 털고 오고 싶다.
써내려가는 내 이야기에 지쳤는지
소설가의 입담이랄까 아니면 진심이랄까 남의 진솔찬 이야기들이 듣고 싶어진다.

이청준 작품목록

영화를 보고,
새삼 또 사람이 섬처럼 느껴진다.
너는 네 이야기만 하고 나는 내 얘기만 하고 서로 답답해 돌아가시겠단다.
서로 암만 외쳐도 알아들을 수 없고
자기 멋대로 인생을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 부닫힘에 다쳐 죽을 것 같이 까무러치고, 또 터질 것 같이 행복해 한다.

인간의 존재,
자기 하나 돌보는 소명을 타고 난걸 까먹고
욕심 부리다 자기를 다치게 하고 결국 제발 살려주세요 해야 하는 나약한 존재다.
그래 우리의 한계도 가능성도 인간껍닥 안에 들은 모냥 산다.

남들은 이 영화서 용서를 본다는데... 본디 소통이 불가한 인간이 용서 할 수 있는건 자기 밖에 없는듯 하다. 그나마도 힘에 부쳐 허덕인다.

+ 덧붙여 --------------------------------------
이영화에 용서라는 관점에 대한 논의가 있어 마음에 들어와 있던 참에 이러한 얘기를 들어 소개코자 함.


대전시립미술관의 이종상 화백전시회가 끝나고 운송 중에 작품이 한점 훼손되었다 한다.
이에 관장님, 학예사분, 운송회사 사장님이 급히 서울로 용서를 구하러 갔단다.
물론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고 갔단다.
처음에 물론 화를 내시고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지...)
이화백은 운송회사 사장에게 뭐하던 사람인가 물어봤단다.
그는 미대출신이었으나 그림을 포기하고 사업을 하고있던 차라
(아마도 그림을 운송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세계를 맴도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을 터라 생각한다.) 이 화백은 그에게 "삼년 내에 개인전을 열면 내 이 일을 없던 일로 하지"
라고 하셨단다.

이것도 멋진일이지만

이후 직접 훼손된 그림을 보시고 이에 송구스러워 다시끔 재 사과를 하는 관장님에게
그분은 이미 그날 그자리에서 끝난 이야기라 하셨단다.

사과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동시에 남에게 칼자루를 주는것과 같고, '용서 할 수 없어'라는 독기의 씨앗이 되어 사과를 받아든 사람의 몸속에 퍼진다. 이를 알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얼른 잊어버려야 마땅하지만 어디 그런 사람이 있겠는가?
 
인간의 입장에서 무어가 더 멋있다고 할 예기는 되지 않는 듯 싶다.
실제 같은 일이 작년인가에 있었는데
또다른 거장 반열의 화백은 아직까지 용서할수 없다고 하시면서 화를 가지고 계신단다.
그렇다고 그분이 작품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겠지라는 단차적 추측도 웃긴 것이요
누군가 더 멋있다고 얘기할 개제도 아니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단지 인간이란
죄는 짓되 용서는 할 권리가 없는 자신을 달래 이끌어 가는 존재일까라는 생각이 들다가
혹,
용서란 애도를 공유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책임을 같이 지고 또 다른 길로 스스로들를 달래 길을 인도해 가는 인간들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과정이 아닐련지 싶다.

그런면에서 그에게 한수 배웠다 싶은 것 인지...

2007/05/30 19:46 2007/05/30 19:46
이상한 이야기다. 기담이 대게 흥미롭지만 이 영화의 기담 코드는 흥미롭다기 보단 진실되다.


정말 나보다 더 재미없게 사는 주인공은 주인공이 죽는 어떤 이야기에 속해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공임을 알게 된다.

그사실을 알고 하는 일은 자기 집에 애꿎은 물건들을 부수는 일
이제까지 남에게 해를 준 적도 없고 오히려 해를 줄까봐 전전 긍긍하며 살아온 헤롤드는
자신이 죽게된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미칠듯 답답한데 어떻게 표출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정신에 집에까지 와서 기껏 자기 소유임이 확실한 물건들을 내리친다.
그리고 이 장면...
스탠드를 들어 이것을 내려쳐도 될지 잠시 머뭇 거리는 듯한 장면에서 그는 흐느끼며 갈구한다. 그의 인생이 한 장면에 나타나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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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여자 엠마 톰슨이 연기한 카렌 아이플
자신이 쓰는 소설의 주인공을 죽임으로써 소설이 가치가 있다.
그녀는 아름다운 비극을 쓰는 작가이다.

김탁환 교수님이 소설가가 주인공을 죽이는 고통에 대해 수업시간에 언급하셨다는데
심각한 우울이 밀려오기도 한다고... 공감되는 말이다.
진정한 사랑의 완성은 죽임으로 끝날지도 모르겠다.
미니멀리즘적 완성을 위한 만드는 사랑 면에서 말이다.

그녀는 너무 순수하고 자폐적이다. 자기의 소설 속의 인물을 죽이는 방법에 대해서 정말 인간적인 킬러로써 심각하게 고민하고 나날히 초췌해지던 그녀가 자신의 소설의 인물이 실제함을 알고 자기가 소설을 씀으로 그가 죽을것을 알게 된 후 소설을 마무리 하다 터져오르는 슬픔?을 표출한다. 기껏 담배에 밖에 화를 낼 수가 없다.
자기 세상에 속한 것에게 밖에 화를 표출하지 못하는 지독하게 순수한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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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은 스포일러



그리고 결국 결말을 고친 그녀는 자신의 소설을 걸작에서 평작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냥 괜찮다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머뭇 머뭇 손과 구두를 매만지며 저신의 내부를 바라보는 소녀같은 영혼으로 돌아간다. 아... 앰마 톰슨 정말 좋은 연기자다. 조용한 나날들에서 부터 그녀를 눈에 떠낼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가 진짜라서요?

처음엔 자기가 죽는다는걸 모르는 남자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 남자가 자기가 죽는걸 알게 되고, 자기가 그걸 막을 수 있는데도
기꺼이 죽겠다는 남자라면 당신이라도 그런 남자를 살리고 싶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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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결말은... 카렌의 말대로 너무 달콤해서 좀 마음에 안든다 하지만 바꾼데니 봐줘야 할지... ...

영화를 보는 도중 헤롤드 크릭이 삶에 집착하게 되는 과정을 보고 문득 잔인하게 궁금해졌었다. 그렇게 재미 없이 인생을 살면서 왜 그렇게 삶에 목을 매는거지? 어떻게든 살려고 하는 방법이 겨우 숙제를 꼬박꼬박 하는 정신과 상담인것도 그 스럽지만 나름 최선이었을 것이다. 잠깐! 물론 지금은 사랑에 빠져서 그렇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영화에서 헤롤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삶에 대한 욕심이 생긴게 아니라 본능적이었다.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왜 그렇게 살려고 하는건데?  헤롤드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런 듯 싶다.
'아직 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어. 지금까지 했던 그런 삶을 살고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아.
난 다른 무슨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아직 가능성의 존재야.'

죽음이란 뭘까? 죽음 이란 차단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유한해서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 유한성의 자각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드려 하는게 맞겠지. 그가 자신이 죽는 방식을 보고 죽기를 결심했던것을 보면 이 착한 모범생에게 삶이란 숙제는 그런 것이었다. 숙제를 다 못해서 살아야 했고 숙제를 다 마치면 행복하게 숙제를 제출하러 갈수 있을것 같다. 물론 우연히 손목 시계가 대신 할 수도 있고..
2007/03/19 17:46 2007/03/19 17:46
-Sometimes I just wish I could go to sleep till I was 18 and skip all this crap high school and everything. just skip it.
18살까지 잠자는 채로 휙 지나가 쓰레기 같은 고등학교 시절을 건너뛰고 싶어요.
-You know Marcel Proust?
미셀 프루스트를 아니?
-He's the guy you teach.
그사람에 대해 가르치죠?
-Yeah.
그래
-French writer. Total loser. Never had a real job. Unrequited love affairs. Gay.
Spent 20 years writing a book almost no one reads. But he's also probably the greatest writer since Shakespeare.
프랑스 작가인데 완전 실패자야, 평생 직업을 가져본적이 없고 짝사랑에 게이였지
게다가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쓰느라 20년을 보냈어, 그런데 말이야 세익스피어 이후 가장 위대한 작가 일지도 몰라.
Anyway, he gets down to the end of his life, and he looks back and decides that all thoseyears he suffered, those were the best years ofhis life,'cause they made him who he was.
그런데 말이야 그가 나중에 그의 삶을 문득 뒤돌아 보았을때 그가 고통받았던 시절이 가장 소중한 시절이었음을 깨닫게 돼, 그게 자신을 만든 시간이니까...
All the years he was happy? You know, total waste. Didn't learn a thing.
행복한 시간? 그건 정말 낭비지 거기서 배운것이라고는 조금도 없으니까.
So, if you sleep until you're 18 ah, think ofthe suffering you're gonna miss.
그래, 네가 만약 18살까지 자면서 보냈다고 해봐, 아 그 아까운 고통들...
I mean, high school? High school, those areyour prime suffering years.
고등학교 시절은 정말 다시는 찾기 힘들게 고통스러운 시절이야.
You don't get better suffering than that.
--------------------------------------------------------------- in the movie -------

그 보다 더 나은 고통은 찾기 힘들지.
세상은 미인대회 같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미인들의 삶이 아니다.
밝은 조명아래 웃는 것은 거짓이고,
오히려 우리의 삶은 미칠 듯 소리지르고 울때 진심을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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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밝은 조명아래서 꼭 거짓만이 나타날 필요는 없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웃음 지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가려고 한다.
심지어 쉬는 시간조차 어떻게 쉬어야 할지
혼자서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부담을 느끼고 산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봤는가,
아주 오래 동안 방치해 두었던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무엇을 하던 어떤 조명에 어디에 서있든 그것은 나이다.
 
남의 판단에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제껏 나의 고통받은 날들을 알고 그로부터 무엇을 깨달았는지 아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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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miss sunshine
2007/02/25 11:05 2007/02/25 11:05

사랑은 기본적으로 욕망의 반로다.
'가지고 싶다 같이하고 싶다, 저 사람이 내가 되고 싶다' 라는 감정들이다.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예술가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예술대학을 나온것도 아니고 그러한 커리어를 쌓아갈 엄두가 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항상 예술 주변을 빙빙 돈다.
지금 연구하고 있는 주제도 예술에 대한 사랑과 혐오와 의구심을 거쳐 재감동을 하는 과정에서 시작한 연구다. 예술을 할 수 없어 예술을 탐구하는...

풍족의 신과 가난이라는 여인 사이에서 에로스가 태어났고 그는 어머니로 부터 물려받은 동경과 갈구함으로 아버지의 풍족을 그리워 한다. 그것이 에로스, 사랑이다.

주인공은 도청한다. 그가 사랑하는것 실은 사랑하는 지도 몰랐다.
그는 예술을 사랑할수 밖에 없다. 그는 '예술가'보다 더 세심한 '장인'이다.
그의 방식은 도발과 혁신이 아니라 세심함과 꼼꼼함이다.

예술가들은 핍박받고 어려움속에서 절망하는 존재들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들의 삶이 부러울 이유는 없다.
나도 대체 무엇, 어떠한 근본이
사람의 마음을 당기는 것일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해 졌다.

그러다가 다시 영화속에서 힌트를 얻었다.
연출가의 자살에 충격을 받고 극작가는 이러한 글을 기고한다 목숨을 걸고,

...
정부는 모든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일인당 평균 매년 2.3 켤레의 신발을 사고 ,3.2권의 책을 읽는다.
매년 6,743명의 학생들이 올A로 졸업한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는 단 하나의 통계가 있다.
그건 아마도 자연사로 합산되어 발표될 것이다
국가안보부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라
서독과 비교하여 얼마나 많은 용의자들이 자살을 했는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적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 모두가 국가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독일민주공화국은 1977년 이후로 자살자의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알다시피 자살은 이미 최선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피흘리지 않는,열정이 없는 삶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 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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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뛰어난 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 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족처럼 보일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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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그가 사랑하는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지키려다 그것을 부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의 대상을 잃었지만 마음은 이미 피를 흘리고 있기에 조용히 그의 삶을 지켜간다.
그것이 예술을 사랑하는 장인의 숙명일테니
그리고 예술가는 독일의 자유 더이상 열정을 잃어
이후 피흘리지 않는, 열정이 없는 사회에서 죽은 듯 삶을 이어간다.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HGW XX/7의 이름을 발견하고 책을 선물하겠냐는 점원의 물음에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며 말한다. No, This is for me. 그 때 그는 그의 삶을 찾지 않았을까? 삶의 의미란 남에게 주기 위한 선물같은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기적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여 왔는가? 그것은 수행이다. 장인이 할수 있는 예술인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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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받는 사람의 관계에서 이미 주체를 떠난 무엇은 항상 의도와 다르게 돌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이미 어쩔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디어와 소통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겠지만, 가끔은 멀찍이 돌아다녔던 것이 해피엔딩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진심이었을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삶은 그래서 신기한 것이겠지 그 것이 사람들의 피를 돌게 하는 열정의 본질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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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leben der anderen

: 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
2007/02/24 18:15 2007/02/24 18:15

Babel Through R's eyes

하늘이 노하여 바벨탑을 부수고 인간은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다.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은 다름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인간 본능에 있어 다름은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것이다.

바벨 이전의 시대는 어땠을까
언어란 무엇이었을까?
아픔을 만져주는 할머니의 따듯한 손
아무말 없이 보내는 따듯한 눈빛
말을 할줄 모르는 자도 일반인과 똑같이 터뜨리는 울음

소통이란 언어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소통을 언어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이러한 생각이 차단을 불러온다.

요즘들어 더욱 그런생각을 한다. 사회에 좀더 적응했다는 사람들, 남들보다 빠르게 상대를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더 유리한곳에 오르려는 사람들, 원래 삶이란 이런것이라고 예기하며 씁쓸해 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을 잃었고 그래서 오히려 삶에 대해서는 해맑게 웃는 아이들보다 모른다.
사회를 알려고 자신을 잃었고 사회란 그렇게 자신을 잊은 사람들의 집합으로 보이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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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el


2007/02/23 19:54 2007/02/23 19:54

SF film about

Utopia and Dystopia (Dystopia 1)


**관련영화

<아키라, AKIRA, アキラ> 1988 年 作,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
<매드 맥스 2, The Road Warrior > 1981 年 作, 조지 밀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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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SF영화에서 미래를 말한다고 하지만 영화는 현재를 바탕으로 한 상상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영화 속의 인물들은 우리의 근 미래를 현재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현재가 Dystopia로 느껴지는 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영화 속 미래나 세상을 바꾸려 한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Utopia다. Utopia를 꿈꾸는 인류가 Utopia를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가장 소극적인 방법은 안네의 일기같이 판타지를 꿈꾸는 것이고, 다음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영웅을 꿈꾸거나 무엇이든 우상처럼 만들어 영웅으로 믿으려 하거나 영웅이 되려 한다.

영웅은 어떠한 존재로 나타날까? 실제로 슈퍼히어로같이 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비 목적적인 인류애로 세상을 사랑 할 수 있을까? 슈퍼 히어로물의 공통점은 슈퍼 Villain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 악 외의 사람들은 선의 편이다. 이렇게 이분화된 세계에서 Super Villain에게 대항하는 것은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세상 자체가 악을 표상하고 있다면 세상의 파괴가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로 보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진리를 세우기 위한 세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예술을 하여 예술로 각성하게 하거나, 본질이 희생하여 각성하게 하거나, 국가를 세우는 것이 그것이다. 예술이 사회에 아무리 외쳐도 듣는 이가 없고 사람들이 분신을 하며 자신의 진실을 얘기하며 본질을 희생하며 사라져도 사회가 바뀌지 않을 때 진리라는 이름으로 쿠테타가 일어난다. 그러나 국가를 세우는 것이 과연 utopia의 건국이었나? 쿠데타로 세운 국가이든 아니든 우리에게 Utopia가 온 적이 없다면 진리를 세우기 위한 그의 방법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모든 파괴가 Utopia를 부르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진정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Dystopia로 만들고 Utopia를 꿈꾸게 하는가?

‘アキラ’에서 세 아이들은 마지막에 자신을 희생하고 새로운 시대의 씨앗의 상징인 카네다와 케이를 세상에 남기고 그전의 세상인 네오도쿄를 같이 파괴한다. Dystopia영화의 스토리구조는 항상 그런 이상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며 끝이 난다. 사람들은 그렇게 Dystopia에서 Utopia의 생성의 가능성을 보고 Dystopia적 미래를 그린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문명이 발전이 인류에게 행복을 주는 하나의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이 착각임을 인간의 문명은 퇴화할 수도 있다는 생물학적 역사관이 Dystopia를 만든 것처럼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러한 점에서 영화를 볼 수 만은 없다.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완전한 Dystopia의 세계가 완벽하게 무너지고 Utopia가 탄생하는 그 거시적 관점의 시작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관객은 현실과 Dystopia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우선 몰입을 하고, 그 속에 숨어있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영웅과 자신 혹은 주변의 누군가로 그 인물을 투영시켜 처음부터 Utopia를 위한다기 보다는 무엇이 그에게 있어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Utopia를 같이 꿈꿔 보는 것에서 의의를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결국 Utipia의 정의는 어느 영화도 예기하지 않는다. Utopia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 생각처럼 거대한 사회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보다 상당히 개인적이고 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Dystopia가 자유를 얻지 못하는 구성원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미래상이라 할 때 Dystopia는 그 정의에 따라 두 가지 모습이 있을 것 같다. 영화 속의 그 두 Dystopia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 사회를 Dystopia라 생각하게 되고 무엇을 Utopia의 씨앗으로 생각하는가?

매드멕스2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 사회가 핵전쟁으로 문명이 붕괴된 과거 같은 미래이기에 Dystopia 영화라 생각한다. 과거로의 회귀를 택한 그 사회는 퇴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물학적 역사관에서 Dystopia라는 말이 유래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정관념으로 매드맥스2의 사회는 Dystopia인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의 미션은 핵 전쟁등의 문제가 아니다. 자원 고갈 또한 정말 심각해졌지만 지금의 상황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사회를 정말 Dystopia로 만드는 것은 자유의 상실이다.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언제나 자연과 가까워지는 세상을 꿈꾼다. Dystopia란 그의 자유가 억압되는 상태를 말한다. 매드맥스2에서 요새 안의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는 요새에 자신들을 강금한 형상이 되었고 그저 요새에서 나가는 것, 그저 남쪽으로 가서 바다를 보는 것이 그들의 생명을 건 유일한 목표가 된다. 그 사람들에게 Utopia는 핵전쟁 이전의 자원이 풍부한 세상일까? 그들의 Utopia는 그야말로 그들이 가리키는 엽서 속 같은 세상이고 그곳은 자신들의 자유권이 인정되는 세상이지 핵전쟁 이전의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닌듯하다. 마지막에 소년은 부족장이 된다. 그들은 새로운 자유의 아나키즘 사회를 떠도는 유목민이 되고 자유를 얻음에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생물학적 역사관에서 보면 여전히 그 사회는 Dystopia다. 사실 달라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출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영화를 본 사람들의 만족감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생물학적인 Dystopia의 정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 다른 축으로 자연과 점점 멀어 진 인류에게 있어 Dystopia는 무질서함이 되기도 한다. 그곳은 ‘アキラ’의 네오도쿄이다. 이러한 Dystopia는 황량한 황야의 매드맥스의 Dystopia와 완전히 다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으로 인간미는 없는 도시 자체가 인간보다 더 큰 무엇으로 인간을 억압하며 그 비대한 뒤뚱거림은 스스로 통제력을 잃은 상태이다. 이러한 도시의 Dystopia는 바벨탑의 전설을 두려워하며 형성된다. 고도의 과학 기술이 주술과 같은 마력을 가지게 되면 과학 본래의 합리성은 감당 할 수 없는 비합리성을 가지고 일명 금단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간은 새로운 영웅이 출현해 이 달려가는 도시에 제동을 걸어주길 원한다. 그 발전한 사회에서 정말 합리적인 세상에서 무당이 출현하고 사회는 ‘アキラ’의 존재를 열망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Utopia는 궁극적으로 컨트롤 가능한 공간이었던 것 이지만 ‘アキラ’는 통제할 수 없는 파괴성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문명이란 이름으로 이러한 원시의 자연성을 야성과 비합리의 공간을 합리라 생각되는 규칙의 공간으로 만들어왔다. 법이 지배하고 규칙이 있는 공간에서 그들은 행복하고 Utopia를 맛본다. 그러나 숨어있던 자연이 합리라고 믿어온 인간의 규칙적 구조와 부딪히기 때문인지 극단의 과학과 문명의 발전은 원시의 자연과 만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사람들은 야만의 사람들을 따로 격리시키며 안정된 통제 속에서의 자유에 행복해 한다. 그들에게 있어 행복함에 대한 이기적 욕구는 무서울 정도여서 민주주의든 전체주의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복인 것이다. 이것이 Utopia라면 우리의 Utopia의 정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이 영화의 Utopia의 씨는 겨우 인류를 다시 출발점으로 돌려준 것이다. 인류의 생물학적 역사관에서 보면 3차 대전 이후 복구한 도시에서 다시 인류는 Dystopia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이 Utopia의 씨라고 역설하고 있다. 과연 그게 Utopia인가? 인류는 또다시 네오도쿄를 만들지 않을까? 통제 가능한 도시를 세우다가 비대해져서 다시 침몰하는 반복 말이다.

그렇다면 Utopia란 무엇인가? 사실 Utopia는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Utopia는 꿈꾸어지는 것이고 그 사람 각각 모두 다르게 가지고 있는 이상향이다. 이상향에 대한 현실적 사회를 가리켜 Dystopia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Dystopia를 형성하는 요인은 검증되지 못한 사회전체가 근거 없이 믿고 있는 관념이며 Utopia는 모두의 마음속에서 다른, 그때그때 다른 것이다. 결국 Utopia는 누군가의 Dystopia이기도 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dystopia는 어떻게 형성되고 그려지는지 살펴보자 한스 제들마이어는 현대미술을 보고 이것은 사회가 비정상적이어서 나타난 병적 현상이고 현대 사회를 ‘고차원적인 정신상태를 희생시켜 얻은 한층 저하된 정신상태의 비대증’이라 정의한다. 재미있게도 현대미술은 그가 걸어왔던 발전의 길을 역행하면서 발전한다. 피카소에서 형이 대상을 닮을 필요가 없이 파괴되었고 마티스에서 색이 자연의 색이 아닌 자신의 색이되고 칸딘스키는 색과 형의 유희만으로 회화를 그린다. 재제 자체는 원시미술처럼 돌아가 헤겔의 생물 계층을 거꾸로 탐색하게 된다. 신에서 인간의 추한 모습으로 추한인간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에 이르면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된다. 이러한 인간은 미래파에서는 영혼이 없는 무기체인 기계와 결합하기에 이른다.‘アキラ’에서 ‘테츠오’는 신처럼 보이다가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 되고 동물과 같이 욕망에만 충실하다가 기계 팔과 결합하고 결국 풍선처럼 부풀어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인간은 이것을 Dystopia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방향성은 관념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 삶에서 우리는 이미 인간성의 끝을 보고 마지막 단계인 무기물과 결합하고 있지 않은가? 카네다와 바이크가 한 몸이 된 것처럼 맥스가 차와, 캡틴이 헬리콥터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Dystopia로 보지 않는다. Utopia는 순간적이고 개인적 꿈이지 이것이 사회가 구는 꿈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Natzi 전체주의다. 이는 누구에게 Dystopia다. 사람에 따라 자유를 아니면 통제를 행복의 조건으로 보는 사람들로 나뉘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언제나 Dystopia가 될 가능성은 있다. 같은 이유, 누구나 Utopia를 꿈꾸지만 이는 누군가의 Dystopia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관념적인 Dystopia와는 한참 거리가 멀 것이다. 생물학적 퇴행과도 거리가 있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미래가 현재가 되면 그 때를 사는 사람에게 있어 Dystopia는 또 다른 세계고 Utopia를 꿈 꾸지 못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과학 발전에 의존해 생기고 사라지는 개념이 아니라 좀더 인간의 판단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2006/12/22 11:23 2006/12/22 11:23

Distopia 2 Through R's eyes

SF film about

Dystopia 2


**관련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年 作, 리들리 스콧 감독
<혹성 탈출 Planet of the apes> 1968 年 作, 프랭크린 J. 샤프너 감독
<혹성 탈출 Planet of the apes> 2001 年 作, 팀 버튼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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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역사’로써의 SF영화에 대해 두 영화의 Storytelling 방법이 Dystopia적 미래를 대안역사로 그려내는데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이야기한다.

많은 SF영화가 미래 혹은 과거를 그린다. 지금의 상황과 거의 같지만 단 한가지만(대부분 과학기술에 의해 변화된 것) 달라져 그대로 다른 시대로 외삽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SF는 역사영화적인 면을 띄고 있다. 단 과학기술에 의한 대안 상상 역사인 것이다. 저번 주 주제인 Dystopia에 이어 이번 영화들도 Dystopia를 그리고 있다. <혹성탈출>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유인원들에 의해 압박 당하여 개인의 생존권과 자유권이 압박된 Dystopia를 그린다 인간이 진화상으로 퇴화하는 미래가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종이 더 발전 할 수 있다는 상상의 대안 역사인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과학기술의 발전이든) 목표라는 대의명분에 의해 다른 종, 자연을 희생시킬 때 나타나는 욕심에 의한 Dystopia이다. <블레이드 러너>는 리플리컨트들의 반란으로 인해 무질서한 사회를 감당 할 수 없어 블레이드 러너라는 직업의 리플리컨트 암살자를 두고 그 안에서 자유롭다고 안전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그리고 있다. 인간들은 자신의 안전한 삶을 위해 직업과 급여라는 보상으로 누군가 희생양을 필요로 하고 이 일그러진 영웅은 의무감 사명감을 가지고 인간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개인 내부에서 곧 사명감은 자신이 적으로 싸우고 있는 리플리컨트와 인간의 차이점에 대한 의심으로 바뀐다. 그는 양쪽에서 버림받은 자신에 대한 조소와 불안에 휩싸인다. 자신의 안전 불감증에 휩싸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 어딘가 인공적인 우산아래 들어가 우물 안에서 행복한 인간의 욕심이 부를 인간성 희생에 대한 대안역사이며 Dystopia이다. 결국 인간의 욕심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는 dystopia에 대한 불안이다.

사회적인 불안은 예술에 반영된다.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에 의하면 인간과 그가 느끼는 자신의 주변환경과의 관계가 예술의 형태에 영향을 준다. 자연을 안전한 것으로 보고 그 속에서 만족을 느끼는 인간은 그를 모방하며 재현회화를 만든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낯선 사막에 떨어져 밤이라도 되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환경의 인간은 불안에 휩싸이고 이 불안이 추상을 부른다. 많은 SF영화의 Dystopia는 현실의 불안을 반영한다. 오히려 전쟁 이후에는 SF보다는 회복의 드라마 혹은 삶의 무게나 세대갈등이 주제가 되어 영화가 위안의 역할보다는 메시지 혹은 질문을 던지는 매체가 된다. 그러한 미래라기 보다는 현재를 그리는 영화가 나오지만, 아직 전쟁을 경험하지 않고 그야말로 불안의 상태에 놓이게 그 전쟁은 영화 속에서 먼저 이루어지며 이는 보수주의 성격을 띄게 되면 위안, 미처 인식하지 못한 문제에 대한 소수 혹은 자유주의 적인 성격을 띄면 경종의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서구 국가의 전체주의 국가의 핵무기에 대한 불안은 보수주의적 시각을 만났을 때 007 series를 만든다.

이러한 불안의 대상이 과학기술인 경우 SF영화가 탄생하는데 유전공학, 핵전쟁에 대한 불안은 단골메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원폭이나 고엽제의 피해로 인한 전쟁 이후 유전자에까지 영향을 미친 무기들에 대한 공포는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했던 인간의 비인간적 모습에 대한 불안과 합쳐져 68년 <혹성탈출>을 낳는다. 이 영화의 경우 이러한 경종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반전이라는 수단이 효과적인 역할을 해내었다. 그곳이 지구라는 것을 넘어 미국인들에게 자유의 상징인 여신상이 부러진 채 처박혀 있다는 것은 잘 짜인 Context상에 놓인 충격적이고 직설적인 Visual image message이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며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영화의 과거를 더듬어 가게 되고 그때 자세히 묘사되지 않은 설정이라도 하나하나 빛을 보게 되는 효과를 얻는다. 가령 핵전쟁으로 인한 인간들이 퇴화한 자리에서 유인원들이 진화를 시작했다라는 말 한마디의 설정을 돌아보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는 아예 인간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겨우 형사와 서장정도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인 한 개인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게 하는 방법을 쓴다. 사회가 어떻다고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고 모습 자체도 새로운 방식으로 미래상을 그리고 있어 관객은 거리감을 느낀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일본 문화가 뒤 덮는 고층 빌딩의 비 오는 Dystopia설정이 익숙하지만) 인간의 안전한 세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보이지 않고, 그곳에서 배제된, 그 경계에 서있는 듯한 데커드 개인의 내면 갈등을 관객들은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된다. 소설로 읽는다면 주인공 시점이라기 보다는 철저히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관찰자의 시점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관객은 리플리컨트인 ‘로이’에게 몰입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그러한 점은 데커드에게 몰입이 되어있던 관객이 두려움을 느끼며 같이 도망하다가 건물에 매달려 덜어지기 일보직전에 로이가 못박힌 손으로 그를 잡았을 때 나타난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그의 독백을 통해 관객들은 처음으로 이 영화에서 인간미를 접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더욱 따듯하고 더욱 그립게 느껴지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범인을 잡는 스릴러 혹은 형사물의 이야기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악역인 범인이라 볼 수 있는 리플리컨트들을 비슷한 시간을 투자하여 먼저 보여주고 그들의 불안과 갈등에 대해 공감하게 한 점이다. 특히 타이렐을 죽이는 로이는 세상이 두려워진 인간이 신을 부르다가 신이 죽었다고 선언 해버리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한다. 관객은 이러한 점에서 리플리컨트도 인간과 다를 게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보너스로 마지막 유니콘 장면 등이 추가되면서 데커드가 리플리컨트 일 것이라는 주장이 생기고 감독이 이를 지지하면서 공감을 했던 두 인물과 괴리감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는 또한 보통의 이야기들은 선 악 등의 대립항에 의해 갈등을 만들어 내는데 결국 이 영화의 갈등구조를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관객 내부의 갈등이 이 영화를 계속 곱씹게 한다.

인간들은 대게 상상을 바탕으로 한 첨단 과학 기술을 생각하며 꿈에 부푼다. 그러나 대안역사 영화들은 이러한 꿈이 너무 장밋빛이 아닌가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래야 이야기로써 갈등도 생기고 잘 만든 갈등이 높은 Story-Value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핑크빛 미래를 꿈꾸며 만들었던 인공의 과학기술이 역사적으로 보면 자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인간에게 더 이상 자연이 말을 걸지 않게 했고 인간은 소외와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이제 기계와 인간이 합쳐지는 일도 상상할 정도로 기계, 공학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혹성탈출의 이종간의 평화처럼 자연과 인공이 화해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데커드처럼 괴로워하며 그 세계에서 침전해야 할지 과학을 사용하는 이도 개발하는 이도 품어야 할 문제다.

2006/12/22 11:21 2006/12/22 11:21

SF film about

생체 공학


**관련영화

<가타카, Gattaca> 1997 年 作, 앤드류 니콜 감독
<아일랜드, The island> 2005 年 作, 마이클 베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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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꿈을 꾸는가? 꿈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꿈을 소중한 것으로 그를 있게 하고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꿈이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꿈의 아름다움은 불만족의 이면이 아닐까? 꿈은 완벽한 무엇인가에 대해 부족한 개인이 가지는 열등감, 공허감이며 이것을 채우고 만족하고 싶은 욕망에 아름다움이란 포장을 두른 표현이기도 하다. 인간의 못 이룬 안타까움의 씨가 자란 것이다. 이 아름다움의 가상 속에 인간이 저지르는 많은 행위들은 단지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희생되어간다. 꿈을 위해서 목적을 가진 인간이 인간을 도구 즉, 미디어로 다루기 시작하면 생체공학이 시작된다. 역사상 인간은 영원하지 못하고 가역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자신 고유의 가치를 영적이고 초월적인 곳에서 찾아 비가시적 영생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생명공학은 그런 절대적 가정을 없앤다. 인간은 그가 더 이상 가역적이지 않음을 알게 될 때 그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여기서 꿈의 부재가 발생한다. 인간은 실제로 가시적인 영생에 가까워 지고 있는 것이다. 꿈을 위한다는 이름 하에 다른 기술보다 생명공학의 유혹은 기계적 무기체의 딱딱함에 대한 유기체의 따듯한 만큼이나 달콤하다. Gattaca에서 주인공 Vincent는 신이 만든 자연적인 임신에 의해 탄생된 아이다. 그러나 유전적 엘리트주의가 사회적으로 인정이 되는 사회에서 우주 비행사를 꿈꾸는 그의 운명은 꿈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현실적으로 꿈을 꾸는 방법에 대해 강구하는 두 가지 기로에 놓인다. 그에게 꿈을 포기하라고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원래 세상에는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있었다. 이 일자(一者)의 의지가 개별화 원리에 따라 갈라져 우리가 보는 이 표상의 세계가 탄생한다. 결국 우리들은 조그만 욕망의 조각들이다. 일자가 개별 의지들로 갈라질 때 이 조각들의 차이에서 우리가 각자 세상을 보는 각각의 표상의 세계가 탄생하고, 의지들의 차이가 지워질 때 그 세계는 한때 그것을 뱉어 놓았던 존재의 영점(零㸃)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아일랜드에서 클론들은 그들의 본질적인 차이로 인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구분이 되고 하나의 캐릭터가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두가 아일랜드를 가기를 소망하기로 프로그램이 되고 모두의 차이를 지움으로써 그들은 개인이 아닌 그룹이 된다. 결국 차이들을 낳을 때에 세계가 탄생하고 차이들을 지울 때 세계는 사라진다. 사막에 쏟아져 나온 하얀 유니폼을 입었지만 각자 생각이 다른 그 상태에서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꿈은 내가 남과 다른 것을 보고 당황한 개별 자들이 무엇인가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이는 세계의 끝, 영점을 향하는 것이다. 개별 자들은 과연 그 절대적인 것을 자기 안에서 찾는 진정한 자아로의 수행의 결과로 차이를 더 크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인지하는 것이 얼마나 절대적일 수 있을까?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다 보면 완벽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차이를 만들어 나가는 것 조차 하나의 경향으로 묶이다 보면 같아진다. 더 이상 사람들은 나의 숨은 매력을 드러내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남과 구분되지 않는 모습으로 세상에 스며들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 되었다. 그렇기에 화장의 미는 성형의 미가 되는 것이다. Vincent가 만약 성형과 극단적인 생체공학 시술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예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매일 반복되는 camouflage에서 그렇게 그는 존재한다. 그러나 위장이 아닌 변신이 될 때 우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하나의 의지가 Vincent인가? 그는 과연 자신이 되기 위한 의식을 한 것인가? 자신을 지우는 의식을 한 것인가? 우리는 상대적으로 나와 남의 차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인지하고 다른 개별자의 특성을 지우고 일자가 되고 싶어 한다. 내가 꿈을 꾸는 세상이 있다는 것은 현재가 만족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자의 세상에서 무엇인가 되고 싶은 욕망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일자의 세계에서 나는 의미를 잃는다.


예술은 언젠가부터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 표현의 신선함이 가치고, 의미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낳는 예술세계에서 새로운 것의 무한 생성은 무엇이든지 무한한 자기복제의 스펙트럼(전혀 예술적이지 않았던 이미 만들어진 제품(Ready made)들이 예술의 이름을 다는 것부터 모든 구상과 형이 사라져 결국 검은 무엇인가만 남은 작품까지 등장한다.) 속에 존재하여 더 이상 영역을 확장하지 못하고 무의미 해지고 모든 차이는 그 자체로 무의미해져 영점에 이른다. 결국 이런 차이들을 만들어 내는 것 조차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세계가 되었다. Kazimir Malevich의 검은 사각형 너머에는 모든 것의 차이가 사라져 검은 색의 일자로 영점이 되어가는 순간이 있으며, 일자가 개별자로 되는 세계의 탄생이 있기도 하다. 검은 사각형은 아무것도 아니기도 또한 모든 것이기도 하다.

左 Kazimir Malevich. Black Circle. 1920s. Oil on canvas. 105 x 105 cm.
右 Gattaca 에서 Vincent가 바라보는 우주선 안에서의 우주

껍데기인 바디가 실제로 본질이 되었기에 우리는 절대 적인 이데아가 있다고 믿고 그 이데아의 함량을 바디에서 찾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다. 아무도 Jerome이 된 Vincent가 부적합자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다. 그의 최고의 모범 요원의 자질은 그의 노력이 아닌 그의 유전적 결과로 생각되는 것이다. 생체공학이란 그런 껍데기로 이데아의 함량을 평가 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데아 함량을 높이기 위해 행복의 추구의 이름으로 선택하는 수단인 것이다. 사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 개별 자들에게 있어 일자의 완벽성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소멸쯤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한다. 부조리한 일자들을 위한 개별 자들의 세계에서 Vincent는 환멸을 느낀다. 그에게 있어 그런 모든 차이들은 우주로 가면 작은 입자들의 차이처럼 무의미해 지는 일자의 순간이 의미 있는 것이다. 그는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인간은 아픔과 성숙에서 자신이 되어간다. 이 아픔 너무 괴로워 미리 디자인되어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은 그들 자신의 미디어인 몸을 통해 노력을 하는 의지를 배우질 못했다. 그들은 꿈을 꾸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행복은 쉬웠고 결국 가치 없었다. 수영을 하는 형제의 장면에서 디자인된 인간인 Anthon은 그의 형이 또 지게 하는 정도로 수영을 하면 되었다. 그러나 Vincent는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수영을 했다. 세상은 디자인된 인간에게도 힘이 들 수 있다. 미리 백신을 맞고 저항력을 키우는 준비를 하는 단계가 없이 1등만이 중요한 스포츠의 세계에 던져진 Jerome은 그의 패배를 노력의 차이로 보지 못하고 이미 결정 난 자기보다 더 뛰어난 유전자의 승리로 보게 된다. 수영은 그의 생의 전부였고 그렇기에 이미 결정 난 싸움에서 수영은 그에게 무의미 해지고 그는 달리는 차에 몸을 던진다. 그는 미래로 빨리 효과적으로 가기 위해 디자인된 유전자이지만 그의 삶은 2등을 했던 과거에 머물러있다. 그러나 Vincent는 포기 하지 않고 꿈을 꿀 수 있었고 그것이 Jerome은 포기 포기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만들어낸다.

두 영화는 상당히 애매하게 다르다. 어떤 삶에서는 모두가 개별자가 되고 싶어하고 모두가 개별자가 된 어느 삶에서는 다시 일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생체공학적 존재들은 일자와 개별자의 중간에 애매한 위치에 서있다. 돌아간다는 것, 마음속에 안정을 가져다 줄 회귀는 사람마다 의미를 달리한다. Vincent에게는 오히려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를 버림으로써 생기는 에너지가 우주로의, 수영을 하는 건너편으로의 회기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링컨에게는 자신에 삶에 대한 자신의 소유를 얻기 위한 끝없는 투쟁,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차이 만들기의 개별화가 자기로의 회기다. 하나는 영점으로 회귀하는 것이고 하나는 개별 자로의 회귀를 꿈꾸기에 나타나는 차이다. 그런 면에서 회귀라는 것은 상당히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어쩔 수 없이 꿈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꿈이란 부적격자의, 불만족자의 특권이다. 아픔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일자와 개별자의 두 갈래 길에서 꿈이 있는 사람에게 꿈은 방향성을 제시해주지만 꿈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길은 풀 수 없는 난제다. 그 꿈이 얼마나 ‘자신 스러운’ 스타일의 것인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2006/12/22 11:18 2006/12/22 11:18
태그 :
SF film about
Super-Hero

**관련영화

<수퍼맨 리턴즈, Superman returns> 2006 年 作, 브라이언 싱어 감독
<수퍼맨, Superman> 1978 年 作, 리차드 도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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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영웅은 어떤 모습으로 달라지는가?
1978년 작 수퍼맨은 ‘30년대를 배경으로 세계의 경제적 공항을 비껴간 메트로폴리스 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영화가 만들어진 때는 ‘60년에서 ‘75년까지 이어진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해 미국전체가 대의명분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때였다. 원작 만화가 38년에 나옴으로 공항을 배경으로 그리긴 했지만 이미 지난 공항이 70년대에 영화에 쓰인 이유는 미국에 다시 닥친 위기를 의미하며 동시에 미국에 위기가 비껴갈 것이라는 소망적 낙관과 기대로 인한 설정으로 보인다. 미국은 그들의 국가를 건설하고 주장한 대의명분인 자유, 민주주의, 기독교 와 청교도적 사고, 유대감과 공동체 주의를 공공연히 표명하는 국가로 동시에 미국이 전세계에 이 개념들의 수호자가 되고 싶어하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상황에 베트남전의 패배는 정신적 큰 위기였으며 미국의 정신을 수호하는 대리인이 필요했다. 78년 영화의 수퍼맨은 이러한 미국의 요구에 부흥하여 만들어진 영웅으로써 미국의 백인 남성의 모범적이고 이상적 모습과 함께 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낸 메시아, 예수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전후 미국은 히피운동과 플럭서스 운동 등 좌파성격의 세력의 다양성의 수용이 미덕으로 등장하면서 기존의 보수적인 시각 외에도 다른 시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따라야 할 모범인 영웅의 가치를 다양화함으로써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더 이상 하나의 (이성애자 백인 남성) 스테레오타입이 아닌 다양성 특히 주류가 아닌 소수를 대표하는 영웅이 등장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들 존재의 이유를 정당화하며 모범적인 영웅이 그들의 과제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수퍼맨의 원작도 만화였듯이 이들의 시작도 Comics에서 시작하여 백인주류사회에 흑인 영웅에 대한 이야기, 홀로코스트를 겪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그들의 자손들을 다루고 있는 유대인 영웅, 2000년에는 ‘Green Lantern’라는 Gay 영웅이 등장하는 만화가 매월 65,000명의 독자들로부터 구독되어 주류에 오른다. 이러한 변형된 ‘수퍼맨’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남성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브라이언 싱어가 2006년에 속편으로 만든 수퍼맨 리턴즈는 감독 개인의 성 정체성을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소수자를 위한 영웅, 특히 Gay들을 위한 영웅을 그린 영화라는 것이 겉으로는 드러나있지 않지만 곳곳에 숨어있다. 특히 78년의 수퍼맨의 많은 부분에 오마주를 보내면서도 동시에 기존과 같은 장면과 물건이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고 이것이 어떠한 상징을 가지게 하는지, 달라짐을 찾는 묘미가 있다. 사실 이렇게 연출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영웅의 설정에서 비롯한다고 보는데 수퍼맨의 경우 그의 힘의 근원이 그가 근본적으로 탄생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만 다른 영웅(스파이더맨 이나 베트맨의 경우) 일반인들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설정에서 비롯한 것이긴 하지만 후천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이야기상 소수자를 대표하는 영웅이 될 수 없다.
클라크는 수퍼맨1이나 리턴즈에서나 모두 어수룩한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1에서 클라크는 아무도 안볼 때 이것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느낌을 준다 깡패의 총알을 받고 뒤돌아 웃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리턴즈의 클라크는 정말 어수룩한 것 같다. 게다가 그의 아들 또한 천식이다. 이는 이후 나왔던 스파이더맨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예상된다.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는 소수의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내부에 숨어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이다. 1에서 수퍼맨은 그의 감정에 솔직한 편이다. 사랑하는 여성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재치도 신사적인 면모도 보인다. 이런 면에 이어 악당을 대하는 태도 또한 작은 악의 경우 재치와 유머스럽게 대처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랙스 루터에 대해서는 불같이 화를 내며 교도소까지 끌고 들어가는 법의 수호자의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수퍼맨에 대해 로이스 레인이 하는 생각 속의 말은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나중에 열심히 구해주는 그에게 투덜거리는 것 또한 인간이 신에게 투정부리는 그 모습 그대로이다. 그러나 리턴즈의 수퍼맨은 신이 인간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모습이며 사랑이 그의 힘이다. 그는 절대 힘을 폭력으로 사용하는 법이 없다. 그는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보존하며 1에 비해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힘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에서 나온다. 거대 머신 건과 눈으로 들어오는 총알도 그는 다 포용한다. 이는 관용을 상징한다.
수퍼맨 시리즈의 영화들에서 수퍼맨은 악당을 다 물리치고 나서도 뒤 처리까지 해야 하는 부담을 진다. ‘78년 작에서 랙스 루터가 만든 지진을 뒤처리 하는 중에 로이스 레인이 죽고 만다. 그래서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아버지 신의 뜻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며 인간 역사에 개입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낸다. 미국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은 방관하고만 있으면 손상되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수퍼맨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힘을 써서 산사태를 내고 지구를 거꾸로 돌리는 행동까지 하 듯)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것이 옳다는 정당성을 부여함을 찾을 수 있다. 2006년 작 수퍼맨 또한 랙스 루터가 만든 괴 대륙을 우주로 던져버려야 한다. 임무는 완수했지만 그 와중에 크립토나이트에 의해 힘을 잃고 하늘에서 떨어진다. 1편에서의 수퍼맨은 스스로 힘을 얻고 판단하며 약한 것은 다른 인간들임을 부각하는 반면 리턴즈에서 영웅도 추락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도 악에 의한 것이 아닌 추락하는 시대, 더 이상 하나의 영웅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는 시대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대의 영웅을 해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에는 전반적으로 이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를 다치게 하는 크립토나이트의 의미 변화에 대해서는 이후에 보도록 한다. 우선 그를 다치게 하는 것은 무관심과 거부감이다. 로이스 레인이 썼다는 수퍼맨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즉 수퍼맨을 거부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신이든 인간이든 존재를 거부하고 믿지 않는 것이 제일 무섭다. 많은 Gay들이 그들의 감각을 이용하여 예술과 문화 영역 등에서 활동하면서도 사람들은 인정하는 척하면서 무시하고 그들을 없는 사람 친다.
그렇다면 그를 약하게 하는 운석 크립토나이트는 무슨 의미인가? 크립토나이트는 그의 별에서 온 것으로 그의 탄생과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 편에서 의미하는 크립토나이트는 인간들의 죄이다. 예수는 지상에 내려온 근본적 이유가 인간의 죄 사함이었고, 이 죄를 안고 십자가에 처형 당하게 된다. 수퍼맨이 지구로 보내지는 이유도 약하고 흔들리는 인간들의 마음을 다잡게 할 지도자로써이며 인간의 구원 때문이다. 그는 처형 받는 죄수처럼 쇠사슬에 묶인 크립토나이트가 목에 걸린 채 고통스러워 한다. 이를 풀어주는 미스 데스마커의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의 신사적이고 남성적인 면에 반했고, 그녀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다. 가족과 신사적 남성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반면 리턴즈에서 수퍼맨은 크립토 나이트가 몸에 박히는 고통을 입는다. 이는 똑같이 그의 탄생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는 에이즈를 상징한다. 에이즈에 대한 공포는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Gay들에게는 치명적인 일상의 문제다. 그의 몸에 직접 들어오는 방식, 또한 랙스 루터가 그를 찌르는 데 그로부터 옮겨짐을 의미한다. 랙스 루터 또한 두 영화에서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변화하는데 이는 조금 후에 살펴본다. 크립토나이트는 도한 많은 Gay영웅을 다루고 있는 Comics가 다루고 있는 Hate Crime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괴 대륙에서 그는 힘을 잃고 여러 명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며 전혀 대항하지 못한다. 이는 미국의 심각한 hate crime을 의미한다. 그는 이때 또 추락한다. 다른 만화에서는 이러한 범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독자인 Gay들의 의견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반면 일반관객들이 더 많은 수퍼맨의 경우, 또한 수퍼맨의 설정이 모든 것을 관용하고 폭력을 쓸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러한 일방적으로 부당한 폭력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하여 관객을 대표하는 랙스 루터의 여자친구 키티는 그의 관용에 안타까워하며 높게 평가하고 인류애를 가지게 됨으로써 수정을 버리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리턴즈의 랙스 루터 또한 1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동산에 많은 욕심을 가지고 있는 악당 이지만 많은 면에서 달라진다. 1에서 진 해크만이 연기한 랙스 루터는 유태인등의 욕심 많은 상인들의 복장을 하고 있다. 멍청한 미국인을 수하로 일을 직접 하지 않는다. 반면 리턴즈의 랙스 루터는 의미심장하다. 처음에 그를 인정하고 많은 유산을 물려주는 노 부인은 전에 수퍼맨의 어머니역으로 나왔던 배우이며, 디지털로 열심히 만들어낸 말론 브란도(수퍼맨의 아버지)또한 그를 아들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는 Gay처럼 하이 패션을 하고 나타나며 인도계 배우를 시켜 모든 일을 하게 한다(미국인에 대한 풍자). 그리고 그는 하얀 넥타이를 매고 있는데 평소 패션에는 잘 쓰지 않다가 최근 몇 년 전부터 에이즈 퇴치 운동을 상징하게 된 아이템으로 브라이언 싱어는 그를 마치 수퍼맨의 악한 형제처럼 그려 내고 있다. 그 또한 Gay성을 가지고 있으며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다른 Gay가 에이즈를 퍼뜨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1편에 비해 악랄해 지지 않은 것은 이미 수퍼맨의 적은 그 보다 더 큰 무시와 잊혀짐 이기 때문이며 브라이언 싱어가 악을 연출할 때 마다 그가 속해 있는 Gay커뮤니티내의 다른 이들을 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X-man 시리즈참조) 악하게 된 이유가 있어 악하게만 볼 수 없게 만드는 그의 연출법 때문이기도 하다.

리턴즈는 마지막으로 자손, 후대에 집중한다. 이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여기서 수퍼맨은 그가 자신의 존재를 이어나갈 것을 암시한다. 감독입장에서 Gay들에게는 자식을 정말 바라면서 얻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각별하기도 하며 그가 미래에 상대하게 될 사회는 지금 그가 추락했던 사회보다 더 힘든 사회가 될 까봐, 그리하여 특별한 재능을 선물 받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았다고 느끼게 될지도 모르는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렇게 그를 만들지도 모르는 환경에 대한 걱정이 사랑으로 녹아있다. 우리는 수퍼맨의 눈으로 그가 보여주는 영웅을 자신에 심어가면서 살았다. 그리고 영웅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심지어 영웅은 하나의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브라이언 싱어가 ‘수퍼맨 리턴즈’를 만든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시대를 이끌어 가는 세대의 영웅이 되길 바라고 흉내내고 마음속에 그리면서 성장한 사람들이 또 자신의 영웅을 후세를 위해 창조해야 한다.
2006/12/22 10:05 2006/12/22 10:05
SF film about
Outer civilization

**관련영화

<금지된 행성, 금지된 세계, 금지된 혹성, Forbidden Planet>
1956 年 作, 프레드 M. 윌콕스 감독
<솔라리스, Solaris> 2002年 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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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인간 문명은 외부의 공간으로 그들의 관심을 돌려 우주로 향한다.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대기권을 벗어 날 수 있게 해준 과학 기술 덕분이다. 그러나 외계문명을 조우하는 인간이 우주로 멀리 떠나가서 결국 만나는 것은 미스터리다. 시대를 뛰어넘어 만나기에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는 존재다. 특히 많은 영화에서 결국 멀리 우주로 떠난 사람들이 만나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왜 인간은 자신으로 귀환하는가?

외계의 발전된 문명을 예상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문명의 발전사에 보조선을 그어 미래를 예상해 본다.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기본적인 인간의 발전사의 방향의 극에 달해 있는 것이 미래 발전된 외계문명이라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사에서 인간이 계속 추구해온 문명의 근원, 그 원동력 도달점은 무엇인가? 인간은 상상하고 그것을 현실화 하고 싶어하는 존재다. 그 본능에 충실한 존재고 그들의 상상이 현실화 되는 과정이 문명이다. 현재 발달한 과학기술이 만들고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디지털 가상이다. 이는 상상력의 실현이라는 인간의 역사의 산물이다. 중세의 예술의 대가들은 그들이 상상하는 종교적 세계를 중세의 대성당의 돌과 유리에 표현하였고 그들의 숙련된 기술을 통해 대성당으로 구현되었다. 우리시대의 장인들은 픽셀의 조합으로 비물질 적인 빛의 대성당을 구현해 내었다. 중세의 대성당과 현재의 가상현실은 그런 상상력의 실현이라는 문명사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상상하는 존재라면 상상력은 무엇으로 향하는가? 감히 말 할 수 없는 어려운 부분이지만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행복을 상상한다고 생각된다. 의식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조차 아니 오히려 더 심해진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가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 유희를 즐기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는 굳이 디지털 가상의 세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의미부여를 하고 그러한 가상과 현실의 스팩트럼의 어딘가에 자신을 몰입시킨다. 인간 문명의 방향을 이끄는 즉 리더로 주도적으로 상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먼저 멋진 상상을 하고 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사람이다. 같이 하는 상상은 현실과 가까워 진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은 가상과 구분이 불가능하며 문명이 되어간다.

영화 <금지된 행성>의 로비(Robbie)는 원 재료의 일부만 있으면 이를 바탕으로 유사한 것을 무한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인간의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상상력을 앞으로 투사하고 이를 실현하는(Project) 존재가 이상적인 존재라면 모비우스 박사가 말한 것처럼 크렐인들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 문화의 정점은 그들의 상상과 생각이 바로 현실이 되는 것으로 그들의 원재료는 상상력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우리의 내부의 상상의 세계를 과연 우리가 새로운 현실로 받아들이고 감당 할 수 있는 것인가? 오히려 이것에 지배되지는 않을 것인가 라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상상을 실현시키는 주체가 혹은 상상의 세계의 dominant를 가지고 있는 존재는 개인적이 된다. 금지된 행성에서처럼 모비우스 또한 자신의 이드를 괴물의 형상으로 만들어 (무의식이지만) visitor 이자 침략자 일 수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려 했다. 솔라리스의 크리스는 그의 연인과 같이 존재 할 수 있는 곳에 머물기를 택한다. ‘어딘가 있지만 지구도 이 우주선도 아닌 곳’을 택하기로 하고 기존의 가치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런 그는 과연 과거에 사는 사람일까? 그렇다고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인가? 또 다른 나의 내부가 세계의 안과 밖이 뚜렷했던 과거에 비해 클라인씨의 병과 같은 모양의 세계가 된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상에서 이를 예상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주로 멀리 나가고, 머나먼 미래로 떠난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우리 내부에 있게 되는 것이다.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면서는 나는 어느 파일럿 보다 위대해 질 수 있다. 미사일을 정말 어마어마하게 내뿜는 괴 비행기도 대단하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은 기체가 부서지는 비행기와 혼연일체가 되어서도 부서지지 않는 나, ‘Game Over/ Continue?’를 묻는 기계에게 돈을 넣고 무한으로 도전 할 수 있는 나의 존재이다. 솔라리스의 크리스가 만들어 내는 레아를 어떻게 볼 것 인가? 레아가 말을 하다가 사운드가 멈추어 버리는 장면이 있다. 레아는 그러한 크리스의 기억에 의존적인 존재이다. 크리스의 머리 속에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그녀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심지어 그녀는 그녀가 자살하고 난 이후의 기억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렇게 되면 과연 크리스의 기억이 올바른가도 알 수 없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그의 기억도 변했을 것이다. 기억은 점점 현실보다 아름다워진다. 그가 정말 손을 베었는지는 알 수가 없어져 버리듯이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솔라리스’라는 게임을 하고 있는 크리스다. 솔라리스 내에서는 프로그램을 하기가 너무 쉽다 상상만 하면 된다. 그 쉬운 프로그래밍 언어로 그는 계속 레아를 만들어 낸다. 잔인한 얘기지만 Game Over에 잠시 실망하겠지만 그는 계속 도전 하고 좀더 그의 마음에 드는 레아를 만들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면 인간의 생물로써의 사회적 존재로써의 존재의 조건은 무엇일까? 처음에 우주선에 가둬져 우주로 떠나 보낸 레아는 로봇 같은 느낌이다. 형태만 닮아있지만 주체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순종적인 Subject의 존재이다. 이후 그녀는 자기 존재감을 가지게 된다. 그전의 자신을 그렇게 보냈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자신 스스로가 슬퍼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적으로 공허함을 느낀다. 실존감의 부재를 느끼는 것이다. 기억은 나지만 그것을 경험한 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크리스와 자신이 공존 할 수 있는 다른 곳을 꿈꾸며 사라져간다.

Project한 인간의 가상 속에 다른 Project한 인간이 존재 할 수 있는가? 크리스가 만들어 내는 한 레아는 계속 subject일 수 밖에 없진 않을까? 인간을 신이 만들어 낸 존재라 하면 Project한 신과 Project한 인간의 공존은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Project영역은 신의 Project영역과 계(界)를 달리 하는 것 같다. 레아가 솔라리스를 보고 느끼는 단절감, 인간이 신에게 느끼는 단절감일 수 있다. 레아와 크리스가 토론하던 종교와 신에 대한 이야기, 인간은 신을 긍정 할 수도 부정 할 수도 있는 Project한 존재지만 이는 모두 신의 꿈 내부에서의 일 일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좀더 자신이 되어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자신에 대한 계속적인 궁금증을 가지고 단절된 대화를 이어가려는 노력이 종교가 되었듯 아마 단절이 공존의 조건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공존 할 수 없는 것인가? 어쨌든 영화는 진행형으로 끝나니 그 이후를 알 수는 없지만 무한의 동전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게임을 어떻게 하는지를 통해 우리는 크리스와 그의 레아의 미래를 어렴풋이 예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picture: 솔라리스


picture: 인간의 뇌 from BBC Brain story documentary


솔라리스는 마치 인간의 거대한 뇌처럼 반응하고 혹은 수정체처럼 생겼다. 게다가 이 행성은 (행성의 자의에 의한 것인지, 내부에 외계인들이 살고 있어 이들의 의지로 이루어 진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다. 몰모트 쥐처럼 인간에게 그들이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는 것을 줘보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끊임없이 실험한다. 금지된 행성의 금지된 영역은 행성과 동시에 인간 (모비우스)의 내부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솔라리스와 알테어 행성은 생명체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가이아 이론처럼 이들은 생명체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볼 수 있다. 알테어의 경우 내부는 기계로 되어있음이 드러났지만 모든 문명이 파괴된 몇 십 만년 후에도 이 행성은 자생 할 수 있는 조건이 생긴 것이다. 외계문명의 경우 문명의 부각을 위해서인지 외계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 할만하다. 고도의 과학기술에 의해 물질문명이 정신 문명으로 넘어가 버리면 우리는 모두 영화 <매트릭스>의 사람들처럼 침대에 누워 어딘가에 접속해 살거나 우리 내부의 힘 혹은 과학의 힘에 의해 의지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문명은 사라진다면 우리는 지금 죽음을 향한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과학 기술 혹은 문명은 인간을 파괴하는가? 이카루스가 날개를 달고 태양에 가까이 갔을 때 그는 황홀경을 맛볼 것인가? 후회할 것인가? 아무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처럼 보인다. 아주 긴 시간 속에 진정한 생명체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행성이 되어버린다. 머나먼 우주의 솔라리스의 경우 칸딘스키가 자신의 내부의 무언가를 추상으로 그린 ‘in the blue’와 상당히 닮아있음이 흥미롭다. 우리 내부의 일명 소우주의 세계와 외부의 Outer로써의 우주는 이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picture: Vassily Kandinsky, In the Blue, 1925 年 作

picture: Solaris 영화의 한 장면 中
2006/10/08 19:45 2006/10/08 19:45
태그 :
SF
film about
Aliens

**관련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 우주의 침입자,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78年 作, 필립 카우프만
<제3종 근접조우,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1977年 作, 스티븐 스필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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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en과 Monster


인류는 우주상에 자신들이 유일하지 않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왔고, ‘외계’와 자신들 외의 미지의 지적 생명체인 ‘Alien’에 대해 두려움과 호기심을 키워왔다. 이 호기심과 걱정은 다양한 모습의 Alien과 인간의 조우를 그린 많은 SF영화들을 통해 시각화 되어왔다. 47년 로스웰 사건이 기밀에 붙여지자 각종 근거 없는 소문들을 바탕으로 지구를 방문(혹은 침략)하는 Alien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았다. 이 상상을 구체화 시키면서 인간은 지구로 찾아올 수 있을 정도의 발전된 과학기술을 가진 타자에 대한 상대적으로 부족한 정보 때문에 불안해졌다. 결국 많은 SF영화는 Alien의 지구침략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기존의 인류의 문명을 타자가 파괴한다라는 개념을 봤을 때 Alien의 지구침략은 Monster film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Monster와 Alien은 어떻게 다르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 존재들인가? Monster 의 경우 내생적 존재다. 나의 어두운 다른 면의 형상화다. 낯선 존재이긴 하지만 지구 생물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간보다 지적으로 위대한 존재가 아니며 사고로 갑자기 생긴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지 못한 인간의 지적 능력 혹은 문명의 힘을 통해 제압하게 된다. 또한 Monster는 나의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약점을 상대적으로 쉽게 알 수 있고, 이 Monster와 사투하고 승리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정화하는 의식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Alien은 정말 외생적인 타자이기 때문에 미지의 대상이며 유비를 통해 존재를 이해할 수가 없다. Alien은 그래서 두렵고 또한 궁금한 존재이다. 그들은 기존 생물학적 특성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상상의 산물일 수 있다. 게다가 Alien을 외계 지적 생명체라 부르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이성과 지성을 제일 두려운 것으로 그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Alien film은 Alien과 인간과의 차이를 통해 인간성을 다시 확인 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적으로 열악하다고 느껴지는 불안한 과학기술로는 고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진 Alien을 상대 할 수 없으며 결국엔 인간이 기본적으로 내제하고 있는, 또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인간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드러내려 한다. 그래서 많은 Alien film의 경우 따듯한 인간성을 가지지 못한 1차적 욕구인 생존만을 생각하는 냉정한 Alien이 인간성을 파괴하려는 모습을 그린다. 영화 <신체강탈자의 침입>의 경우 외계인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돌려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인간은 외계식물의 숙주가 되어 신체를 내어주고 영혼을 상실 당한다. 실제로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멀쩡하게 남아있는 강탈 당하는 신체가 아니라 몰개성화로 인한 주체성 상실과 영혼 강탈이다. 영혼을 강탈당한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법은 잠을 자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은 실제 현대의 거리와 다를 것이 없다. 이 모습을 새삼 섬뜩하게 그림으로써 감정이 없는 인간은 영혼이 없는 것과 같고, 잠을 자지 않고 휴식을 즐길 줄 모르는 인간, 노동력으로만 인지되는 인간성 상실의 현대인을 객관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 영화에서 궁극적인 적은 외계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관객은 특수 효과 등으로 드러난 외계인의 모습을 보지 않으면서 인간이 스스로의 모습에서 낱섬과 공포를 느낀다.

Image from IMDB



왜 외계인은 극단적인 전형적 캐릭터인가?


과학기술의 경이로움을 알고 있는 인간에게 발전된 과학기술을 가진 외계의 문명은 상상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은 이 개념에 익숙한데, 인간이 신을 인지함에 있어서 신이란 전지전능한 존재로 천국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말한다. 이 개념을 믿음으로서 종교의 개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상에서) 눈앞에 존재하고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인 외계인을 인간은 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이들이 신이 되지 않게 위해서 인간은 외계인의 존재를 첫째, 도덕성을 상실하거나 둘째, 외계인 스스로가 그들과 우리가 같은 피조물인 하위 개념의 존재로 동지고 친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을 가지게 했다. 첫째 적으로서의 외계인과 인간은 소통이 필요 없으며 본능적으로 적임을 느낀다. 인간은 선함과 아름다움의 개념을 섞을 때가 있다. 따듯한 인간애가 드러나는 이야기를 선담이 아닌 미담이라 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성이 없는 외계인은 선하지 못한 것, 선하지 못한 것은 추한 것으로 그려져 본능적으로 적으로 인지된다. 그렇다면 그들의 침략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신들의 침략역사에서 이 이유를 찾았고 대부분이 생존을 위해서 혹은 노동력이나 자원의 착취를 위한 침략을 그리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번째 친구로써의 외계인은 스필버그의 영화세계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이 외계인과 사회적 관계 즉,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존재한다. <제3종근접조우>에서는 두 가지 방법의 커뮤니케이션 법이 등장한다. 영화 <미션>에서 문명과 언어를 초월하는 가브리엘의 오보에와 같은 음악이 그 첫 번째고 이는 인류 대 외계 문명의 대화법이다. 두 번째로 좀더 개인적인 친밀함은 텔레파시로 전달된다. 주인공들은 UFO를 목격하고 어떠한 이미지에 강렬하게 사로잡힌다. 진심이 통한 존재들이 이미지를 통한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에서 그려진 미스터리에 대한 광적 집착을 보이는 주인공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가정적인 아버지가 자기 가족을 버리고 마치 유치원 아이들 같은 외계인들에게 둘러 쌓여 UFO에 탑승하는 모습은 마치 외계인들의 아버지 혹은 추앙 받는 신 같아 보인다. 친구로써의 외계인을 그린 영화는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겪는 자신 주변의 사회적 관계의 형성과 인지를 범지구적 차원에서 인류가 경험하는 것처럼 그린다. 모든 인류가 하나된 모습에서 유대감을, 인간성을 타자와 나누는 과정에서 강화하는 인간성에 대한 재확인을 가짐으로써 감동을 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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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의 매력

왜 Alien혹은 우주를 그린 영화에서 주인공은 미스터리에 집착하고, 그런 영화를 인간들은 끊임없이 재미있어 할까? 정보가 가지는 힘은 대단하여 정보의 양에 따라 인간의 권력구도가 생긴다. 특히 미스터리에 대해서는 자신의 계층에 따라 정보에 대한 접근 정도가 달라진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 즉 실제는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이 때문에 드러나는 자신의 계급에 대해 다시 인지하게 된다. Alien영화의 정부는 항상 모든 일을 보수적 태도로 대한다. 실제 정보는 그 속성상 중앙으로 모이게 되어있지만 정보의 출처의 발생이 지엽적이고 interval을 예상 할 수 없을 때의 정보는 순간 역의 구도를 가지게 된다. 이때 정보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정부 등의) 계급은 정보를 미스터리화 하고 일부는 거짓된 헛소문으로 일부는 비밀의 이름으로 실제 정보에의 접근을 차단해 간다. 영화 <제3종근접조우>에서도 가장 권력을 크게 가진 사람은 미국 내 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프랑스인 박사였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인에 대한 경쟁 또한 정보의 접근을 보임으로 권력의 정도를 구분하여 계급을 확인하려는 시도였던 것 같이 인간이 우주와 Alien 미스터리에 끌리고 집착하는 이유는 우선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객관적인 해답을 얻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내의 권력 상승 혹은 평등에의 욕심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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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8 19:34 2006/10/0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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