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tan project, Tango 3.0 Through R's eyes
YouTube - GOTAN PROJECT - La Gloria (official video) : http://www.youtube.com/watch?v=FFzk_MX1D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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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 GOTAN PROJECT - La Gloria (official video) : http://www.youtube.com/watch?v=FFzk_MX1DCo


Hibi No Neiro(Tone of everyday)
Artist: NAKAMURA Magico / NAKAMURA Masayoshi / KAWAMURA Masashi / Hal KIRKLAND(Japan / Australia)

요즘 프로젝트로 Kinetic art관련 자료를 찾고있다.
짧은 리서치로 Motion과 Object사이의 시적인 결합이 들어있는 작품을 찾아내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그러나 이는 Motion자체가 시각을 압도적으로 흡수하는 부분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작가 입장에서는 좀 더 멋진 Motion을 찾는 방향으로만 발전하게 되고
관객입장에서도 시적 긴장보다는 당장 시각을 압도해 버리는 감탄에 젖어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Motion은 독이다.
그러나 움직임은 독이라 보기에 너무 매력적인 자체이다.
Motion에도 홀려버린 나를 보며, 솔직히 TV앞에 정신홀린 아이처럼 우선은 사탕의 단맛에 빠져버리는게 싼 미감 같기도 하고, 인간 인지 체계가 그렇게 발전한 탓이겠거니 싶기도 하다.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이 포스팅은 키네틱 아트의 시초 모빌이 현재 어떤발전을 하고있는지 간략하게 알리기 위한 포스팅이다.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고려페인트 광고의 도미노가 생각난다. 도미노의 쓰러지는 속도감 자체에 눈을 때지 못하던 것 말이다. 또 줄리앙 오피의 걸어다니는 사람 LED도 생각난다. 그 작품을 본이후로 그의 간략한 드로잉이 얼마나 모션을 잘 잡아내고 있는지 볼때마다 놀랄뿐이다. 하여 나는 움직이는 gif애니메이션으로 핸드폰에 저장까지 했다! 이후 서울역에서 크게 전시할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렇게 나는 움직임 자체의 매력에 매료되어있으면서도 막상 Kinetic art 작품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다.
키네틱아트는 본격적으로 움직임의 아름다움에 뛰어드는 것이다.
마침 YouTube 검색이 가능해지면서 상당 수의 Kinetic art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프로젝트관련 하여 찾아야 하는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특이한 소재의 움직임을 소개하는 인상적인 모션들을 소개하고, 저장하기 위해 포스팅한다.
나중에 보고서 쓰면서 2탄으로 짬이 나면 원래 조사해야 했던 적품도 소개하면 좋겠다.
+ 제목을 클릭하면 링크로





최근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지만 한편으로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불편해 보이기도 한다. 내 마음이 청개구리의 마음인지, 인터넷 글들에서 원초적 인간의 욕구를 포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이야기들이 홍수를 이루는 것 같다.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던 것이 너무 당연시 되었기에 굳이 이야기 할 필요도 없었던 선조들이 생각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또한 먹는 것에 집중하다 뭔가 놓지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미식가라 하면 탐욕스러운 식탐을 채우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 부정적 이미지가 상상된다. 그러나 『미식견문록』을 다 읽었을 때 요네하라 마리가 말하는 이 견문록은 삶을 이야기 하는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외국에 나가있어야 했던 경험과, 러시아어 동시동역사로 일한 경험 속에서 그녀에게 음식이란 각 문화와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식이었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자신이 먹기 위해 사는 사람에 속한다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 하고 있다.
기행문은 여행지의 간접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결국 독자들이 얻는 것은 여행자의 개인적 삶에 대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모두 먹어본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흥미가 없을 것이고, 아무도 모르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또한 공감을 불러오기 힘들다. 그 것이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 등장할 때 우리가 놓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를 통해 보기 때문에 여행이든 음식이든 소재가 등장하는 것 못지않게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배어든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매력적인 인간성은 좋은 견문록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결국 이 책의 이야기 들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도 되는 미식견문록이라는 면에서 요네하라 마리가 뛰어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별미를 찾아 다니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닌 매일의 식사 속에서 혹은 문화에 녹아 든 음식을 소재로 삶을 이야기 한다.
이 책은 크게 3악장 음악의 형식을 빌려 재미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우선 일본인으로 바라본 러시아 음식과 문화를 이야기한다. 러시아 음식이야기는 결국 그 인접국가인 유럽과 중앙아시아와 까지 퍼져나가게 되는데 새삼 일본과 러시아 모두 우리의 인접국가임을 깨닫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고 받은 영향이 많음에 놀라게 된다. 둘째로 우화와 동화 속에 다루어진 음식을 소재로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 문화적 배경 이야기 하는데 기본 소양으로 가지고 있는 그녀의 폭 넓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습관이 된 깊은 사색과 통찰력이 빛난다. 마지막 3악장은 그녀의 가족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음식과 가족에 대한 따뜻한 동양사람들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요네하라 마리의 글을 읽어가며 문화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때로 식성만큼 보수적인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식탁을 보면 어느새 최근에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레시피부터 언제 들어왔는지 조차 까마득하여 우리 식 자재로 당연시하고 있는 것들도 많다. 그것은 세계의 어떤 곳도 마찬가지다. 문화는 포용하는 것이 특성이다. 문화를 이루는 추상적인 무리의 개체들에게 전달되며 통합되는 방식으로 자신을 전파하고 변형된다.
세계미술시장에서 중국 현대작가들이 연일 최고가를 갱신하고 있고, 일본 작가들은 이미 자리를 잡았다. 음식도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아시아는 중국, 일본 그리고 그 밖의 나라들로 인식이 된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이 들과 구분될 수 있는 한국만의 특징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마다 결국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문화를 경쟁력을 가져야 할 마케팅 수단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문화에 어울리지 않는 엄격한 지워나가는 척도를 적용해 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 아닐까 반성하게 된다. 우리만의 것을 찾으려 했던 문화에 대한 환원주의는 기본적으로 문화의 탄생 방식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는 경쟁관계에 있어 우위를 점령하는 무엇이 아니다. 우리 문화가 뛰어나다고 소리쳐 봐야 다른 문화권의 사람에게는 전제주의적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다. 다른 문화를 그 사람들만큼 사람하고 포용하는 타인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그 타인의 시각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문화에 관심을 가진다. 요네하라 마리는 책 속에서 러시아를 이야기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일본을 녹여 내고 있고, 그녀조차도 생각하지 않았던 각 독자들의 개인적 경험과 만남으로써 따듯한 무언가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문화와 뿌리를 찾아 자랑스러워 하려는 노력이 어찌 보면 힘겹게까지 진행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의 위로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을 통해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매일의 먹거리 하나를 이야기 하더라도 깊은 문화적 소양을 바탕으로 깊은 사색을 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해 보게 된다. 오히려 거대 담론을 만들고 철학을 구성하는 것보다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상의 철학이 등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Synecdoche, New York'을 구상하는 Kaufman을 떠올리며 간혹 웃기도 공감하기도 지독한 외로움과 병에 같이 아프기도 했다. 따듯하게 뒤집은 혹은 인간에까지 적용한 끔찍하게 응용한 버젼의 시뮬라르크가 느껴졌다. 지독하게 외롭고 따듯하고 세심한 영화지만 말코비치되기나 어뎁테이션 때 보다는 영상이 주는 매력이 좀 약하다. 영상으로 스스로 말하기엔 너무 세심하신것은 아닌지? 그리고 Kanevsky의 그림이 좋았다. 어떤 인연으로 그의 그림이 쓰인 것인지 궁금하다. 참 제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잘 지었다.
'Boy A'가 나름 논란적 문제를 사회에 던진다고 하는데(포스터에 보면) 물론 표면적으론 이해하지만 결말을 그렇게 처리해서 그런 것 아닌가? 결말 부분에서 오히려 이야기가 시작되어도 될 듯하니 논쟁이 생긴 것 인듯. 하지만 영국의 매력을 잘 살린 자연스러운 영상 화법은 참 좋았지만 깨끗하기만 하려고 했는지, 영화스럽게 가끔 지지부진하게라도 끌고가는 힘이 들어갔으면 어땠을지 그래도 그 화법덕에 오랜 영화 감상 기피증을 벗어났으니 영화기피증 환자에게 치킨스프 같았달까
'Sa-Kwa'의 매력은 누구에게나 내얘기잖아?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데 있는것 같다. 여기저기서 자기이야기라는 평들이고 나또한 많은 부분에서 속을 들킨것 같았으니, 그렇다면 사랑이 이런것인지 혹은 우리세대 혹은 사회의 구조가 그런것인지 아직 사랑이 너무나 어려운 나에게는 궁금증을 준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처럼 '정말로 노력해보면', 그의 말처럼 '나보다 널 사랑 할 수 있을까?' 뭐 그건 너무 주제를 파고든 감상인듯 싶고, 전반적으론 대화가 없는 장면들의 배우의 연기에서 온갖 공감능력이 발동되어 좋았다. 눈하나 감는 시점 마져그리고 사랑을 따로 떼어넨 것이 아닌 삶 속에서 혹은 오롯하게 또렷하게 즉시하게 만든다는 점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시대를 고려해서 평가한다면'이란 가정은 엄밀하게 과거의 후광을 씌워 지금의 조금 낮은 평가를 올려 보겠다라는 (까칠하게 보면) 것이니 별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며 진부하지만 어쩼든 'Pi'를 만든 Darren Aronofsky는 98년에는 정말 눈이 불타는 '앞날이 유망한 대단한 젊은이'였었던 것은 누구나 얘기하듯 동의하게 된다. 그 이후 Requiem도 젊은 영화인의 시도로만 봤었는데 음, 새로 보인다. Wrestler를 어떻게 만들었길래 말이 많은지도 기대가 된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본 Pi의 그의 시도는 이제는 너무 대중적이고 일반화 되어 친숙해져 버린것은 아닌가 싶어지는 만큼 (심지어 발칙했던 그의 주제마져 TV드라마 속에서 너무 등장해버려 진부해졌다.) 너무 대중적이어도 여전히 너무 '그'같아도 실망할 것 같기도 하다. 대체 나는 왜이리 까칠한 관객인걸까
신기하게 이번 주말엔 요새 영화가 봐진다.
외국 드라마 보게 되느라 영화가 한동안 눈에 안들어왔었는데 이유를 생각해보면 드라마도 한동안 안나올듯 싶고 좋은 영화도 많고, 막상 본 영화들을 보면, 요즘의 극적 현실보다 더 리얼리티를 찾고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예전 단편영화 찾아보던 때같이 영화의 한두시간짜리 플롯과 구성의 매력을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영화 계속 보게되는것도 오랜만, 보려고 생각한 영화가 쌓이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는데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회이길
그나저나 덥수룩하던 머리를 시원하게 잘랐다.
봄날의 닭을 컨셉으로 애매한 짧은 길이이길 바랬는데, 두상 탓인지 매번 짧은 머리는 '너무' 건강해 보인다.
급작스레 허리를 다쳤다가 회복한 학교 달리기 대회 중, 머리가 너무 더웠는데
막상 자르고 러닝머신에 올라가니 머리가 없어 땀이 다 얼굴로 쏟아진다.
허리를 다쳐 취하는 약을 먹으며 거의 대부분 누워 지냈는데 아픈 것 빼면 생각보다 좋았다.
일상의 리듬을 나른하게라도 깨버리게 되어 오히려 새롭게 24시간을 구성하게 되었다.
세상을 너무 세밀하게 선명하게 보고 살았었나 싶었는데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 어찌들으면 위험한 발언이지만 편안해 지기도 한다.
술도 담배도 몸에서 허락되지 않으나 가끔씩 약(치료용도로 받은 감기약 같은 것)은
의외로 만족감을 주니 해외 나가면 아예 입도 데지 말아야 할 체질인가 보다;
더하기를 추구하면 슬프지만 조금 빠진 상태가 되면 일상이 새로 보인다.
지금의 삶의 과잉된 에너지를 다른 곳에 써야겠다는 진단이다.
스콧 니어링의 하루 시간을 구분하여 쓰는 지혜가 계속 생각난다.




박사자격시험을 공부중에 예전 레포트들을 뒤져본다.
문화기술이라는 분야를 다같이 생각해보고 견해차를 좁혀보자는 개론과목에서
거의 마지막 숙제로 '문화기술학의 풀리지 않는 10가지 문제'를 자신이 제시하는 숙제가 있었다.
한 학기 지내보니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하는 숙제가 되었던 사람도 있었다.
CT라는 학문 분야를 CT대학원 내의 문제로 생각한 한편 교수님과의 대화가 필요했던 이유였다.
이후 이 과목에서는 이 숙제를 과목 초기에 내는 것 같다. 한번 고민해보고 같이 시작하자라는 취지 이신 것 같지만 덕분에 나는 1학기동안 숙성된 그러면서 상당히 풋내 가득한 글이 나왔다.
지금으로 부터 3년전 그러니까... 학번이 05인 석사 첫학기 시절에 쓴 내용이다.
뇌는 커녕 미술에 대한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던시절이었는데
혼자 고민이 많았던 그리고 그 고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싶다.
언뜻 지금은 10개가 뭐야 100개는 만들어 내겠다 싶다가도 하나하나 고민해서 만들었던 열정을 유지하고있는가? 라고 자문한다.
more..

사람이 그리울 때 운이좋아 막상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 얼굴을 마주하고있으면서도 지루해짐을 느낄 때가 있다.
그땐 머리속으로 어떻게 이사람과 헤어질까 하는 생각만으로 가득해서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는다.
인스턴트적이고 소비적인 시선으로 사람과의 만남을 바라보는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 대화 혹은 교감을 하기에 인간이 필수 대상인 것은 아닐것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대화의 상대로써 인간을 배제하지 않으면 되는것이지 인간만으로 국한될 필요는 없다는 것
Keith Jarrett 연주에서 그의 표정을 보면, 청각적 정보 이상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고 믿는데
그의 표정이 함축하고있는 음악과 실제 연주되는 피아노 소리가 합쳐져 새로운 음악이 들린다.
내생각에 그는 분명히 속으로 노래를 하고 있는데 (그의 연주를 들으면 가끔 신음(?) 소리가 흘러 나오기도한다)
각 곡의 감성을 한껏 끌어올려 그의 내면에서 풍부하게 소리가 이끌어져 올라왔을 때
최정점에 도달한 음에만 실제 피아노 소리를 얹는것을 허락한다.
그런면에서 그의 사운드만으로는 족적만 남은 미니멀리스트의 작품같아 보인다.
결국 들리지 않는 부분의 매력인것이다.
들리지 않는 부분이 그의 음악을 자꾸 찾게 만들고
그의 얼굴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빠질 때, 입의 씰룩거림에 동요하게 될 때!
혹여나 그가 어쩔줄을 모르고 일어나게라도 되면! 아~ 마음이 같이 어딘가로 떠나가 버리는 것이다.
사실 그의 표정은 너무 힘이 들어간것 같이 보이기도 하다가,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손자를 앉고 얼레느라 어쩔줄 모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피아노에, 그 곡 자체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대하고있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예술가들라면 자고로 깨끗하고 정갈한 결과와 병행하는 그런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흘러넘침이 척연덕스럽게 등장해줘야 하는것 아니겠는가?
예를 들면 Jackson Pollock의 그림을 보며 그가 그 위에서 춘 춤을 생각해보면(액션 페인팅은 거의 광란의 춤으로 볼수 밖에 없지 않을까? 거의 무당의 굿 수준이다.) 그 개인의 공간에 침입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개지면서도 결국 천연덕스러움에 감동 받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예술가에게 허락된 퇴행(?)인건 아닐까.
Jarrett을 보면서 그는 분명 온몸으로 피아노와 소통하고있고, 또한 피아노로 곡과 혹은 아주 오래 이 민요가 만들어졌을 때와 대화하고있다고 믿어졌다.
일명 '텍스트'의 선형적 행태로 '누군가'와 소통하는데 질려버릴 때 우리가 소통할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마시며 적어도 커피빈과 바리스타의 대화를 엳들으려 노력하고, 로스터의 의도속에서 애초의 그린빈이 숨겨온 자연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추측해 보는 재미를 가지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현실적으로 큰 달을 보았다.
아... 정말 큰 달이다. 이렇게 큰 달을 본적이 있었던가? 자동적으로 달의 인력이 떠올려졌다.
결국 저렇게 먼거리에서도 자신 존재의 무게만큼 그는 나를 끌어당긴다. 나도 마찬가지일테고,
그렇게 달이라는 우주적 존재를 통해 무수한 영겁의 과거속에 우주적 시간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인간에게 허락된 생각의 규모는 자유로우니까




Street art by JR


보기






요새 영화에 통 관심 기울일일이 없었는데
떠밀리듯 간 극장에서 밀양의 끝 크레딧에 원작이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더라
천년학, 밀양 ... 우연히 이청준의 이야기들이 2007년에 같이 영화화 되었다.
이청준..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문학가다.
내심 이 분 이야기에 푹 빠져 보려고 다짐만 했었는데
나날이 지치다가
요새 소설이 한 두편 눈에 들어오고 ...
휴가지에 두꺼운 책 가져가 마음의 짐과 함께 털고 오고 싶다.
써내려가는 내 이야기에 지쳤는지
소설가의 입담이랄까 아니면 진심이랄까 남의 진솔찬 이야기들이 듣고 싶어진다.
이청준 작품목록
영화를 보고,
새삼 또 사람이 섬처럼 느껴진다.
너는 네 이야기만 하고 나는 내 얘기만 하고 서로 답답해 돌아가시겠단다.
서로 암만 외쳐도 알아들을 수 없고
자기 멋대로 인생을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 부닫힘에 다쳐 죽을 것 같이 까무러치고, 또 터질 것 같이 행복해 한다.
인간의 존재,
자기 하나 돌보는 소명을 타고 난걸 까먹고
욕심 부리다 자기를 다치게 하고 결국 제발 살려주세요 해야 하는 나약한 존재다.
그래 우리의 한계도 가능성도 인간껍닥 안에 들은 모냥 산다.
남들은 이 영화서 용서를 본다는데... 본디 소통이 불가한 인간이 용서 할 수 있는건 자기 밖에 없는듯 하다. 그나마도 힘에 부쳐 허덕인다.
+ 덧붙여 --------------------------------------
이영화에 용서라는 관점에 대한 논의가 있어 마음에 들어와 있던 참에 이러한 얘기를 들어 소개코자 함.
대전시립미술관의 이종상 화백전시회가 끝나고 운송 중에 작품이 한점 훼손되었다 한다.
이에 관장님, 학예사분, 운송회사 사장님이 급히 서울로 용서를 구하러 갔단다.
물론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고 갔단다.
처음에 물론 화를 내시고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지...)
이화백은 운송회사 사장에게 뭐하던 사람인가 물어봤단다.
그는 미대출신이었으나 그림을 포기하고 사업을 하고있던 차라
(아마도 그림을 운송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세계를 맴도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을 터라 생각한다.) 이 화백은 그에게 "삼년 내에 개인전을 열면 내 이 일을 없던 일로 하지"
라고 하셨단다.
이것도 멋진일이지만
이후 직접 훼손된 그림을 보시고 이에 송구스러워 다시끔 재 사과를 하는 관장님에게
그분은 이미 그날 그자리에서 끝난 이야기라 하셨단다.
사과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동시에 남에게 칼자루를 주는것과 같고, '용서 할 수 없어'라는 독기의 씨앗이 되어 사과를 받아든 사람의 몸속에 퍼진다. 이를 알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얼른 잊어버려야 마땅하지만 어디 그런 사람이 있겠는가?
인간의 입장에서 무어가 더 멋있다고 할 예기는 되지 않는 듯 싶다.
실제 같은 일이 작년인가에 있었는데
또다른 거장 반열의 화백은 아직까지 용서할수 없다고 하시면서 화를 가지고 계신단다.
그렇다고 그분이 작품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겠지라는 단차적 추측도 웃긴 것이요
누군가 더 멋있다고 얘기할 개제도 아니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단지 인간이란
죄는 짓되 용서는 할 권리가 없는 자신을 달래 이끌어 가는 존재일까라는 생각이 들다가
혹,
용서란 애도를 공유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책임을 같이 지고 또 다른 길로 스스로들를 달래 길을 인도해 가는 인간들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과정이 아닐련지 싶다.
그런면에서 그에게 한수 배웠다 싶은 것 인지...









사랑은 기본적으로 욕망의 반로다.
'가지고 싶다 같이하고 싶다, 저 사람이 내가 되고 싶다' 라는 감정들이다.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예술가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예술대학을 나온것도 아니고 그러한 커리어를 쌓아갈 엄두가 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항상 예술 주변을 빙빙 돈다.
지금 연구하고 있는 주제도 예술에 대한 사랑과 혐오와 의구심을 거쳐 재감동을 하는 과정에서 시작한 연구다. 예술을 할 수 없어 예술을 탐구하는...
풍족의 신과 가난이라는 여인 사이에서 에로스가 태어났고 그는 어머니로 부터 물려받은 동경과 갈구함으로 아버지의 풍족을 그리워 한다. 그것이 에로스, 사랑이다.
주인공은 도청한다. 그가 사랑하는것 실은 사랑하는 지도 몰랐다.
그는 예술을 사랑할수 밖에 없다. 그는 '예술가'보다 더 세심한 '장인'이다.
그의 방식은 도발과 혁신이 아니라 세심함과 꼼꼼함이다.
예술가들은 핍박받고 어려움속에서 절망하는 존재들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들의 삶이 부러울 이유는 없다.
나도 대체 무엇, 어떠한 근본이
사람의 마음을 당기는 것일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해 졌다.
그러다가 다시 영화속에서 힌트를 얻었다.
연출가의 자살에 충격을 받고 극작가는 이러한 글을 기고한다 목숨을 걸고,
...
정부는 모든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일인당 평균 매년 2.3 켤레의 신발을 사고 ,3.2권의 책을 읽는다.
매년 6,743명의 학생들이 올A로 졸업한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는 단 하나의 통계가 있다.
그건 아마도 자연사로 합산되어 발표될 것이다
국가안보부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라
서독과 비교하여 얼마나 많은 용의자들이 자살을 했는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적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 모두가 국가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독일민주공화국은 1977년 이후로 자살자의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알다시피 자살은 이미 최선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피흘리지 않는,열정이 없는 삶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 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




하늘이 노하여 바벨탑을 부수고 인간은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다.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은 다름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인간 본능에 있어 다름은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것이다.
바벨 이전의 시대는 어땠을까
언어란 무엇이었을까?
아픔을 만져주는 할머니의 따듯한 손
아무말 없이 보내는 따듯한 눈빛
말을 할줄 모르는 자도 일반인과 똑같이 터뜨리는 울음
소통이란 언어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소통을 언어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이러한 생각이 차단을 불러온다.
요즘들어 더욱 그런생각을 한다. 사회에 좀더 적응했다는 사람들, 남들보다 빠르게 상대를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더 유리한곳에 오르려는 사람들, 원래 삶이란 이런것이라고 예기하며 씁쓸해 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을 잃었고 그래서 오히려 삶에 대해서는 해맑게 웃는 아이들보다 모른다.
사회를 알려고 자신을 잃었고 사회란 그렇게 자신을 잊은 사람들의 집합으로 보이는 것이다.


SF film about
**관련영화
<아키라, AKIRA, アキラ> 1988 年 作,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
<매드 맥스 2, The Road Warrior > 1981 年 作, 조지 밀러 감독
영웅은 어떠한 존재로 나타날까? 실제로 슈퍼히어로같이 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비 목적적인 인류애로 세상을 사랑 할 수 있을까? 슈퍼 히어로물의 공통점은 슈퍼 Villain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 악 외의 사람들은 선의 편이다. 이렇게 이분화된 세계에서 Super Villain에게 대항하는 것은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세상 자체가 악을 표상하고 있다면 세상의 파괴가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길로 보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진리를 세우기 위한 세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예술을 하여 예술로 각성하게 하거나, 본질이 희생하여 각성하게 하거나, 국가를 세우는 것이 그것이다. 예술이 사회에 아무리 외쳐도 듣는 이가 없고 사람들이 분신을 하며 자신의 진실을 얘기하며 본질을 희생하며 사라져도 사회가 바뀌지 않을 때 진리라는 이름으로 쿠테타가 일어난다. 그러나 국가를 세우는 것이 과연 utopia의 건국이었나? 쿠데타로 세운 국가이든 아니든 우리에게 Utopia가 온 적이 없다면 진리를 세우기 위한 그의 방법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모든 파괴가 Utopia를 부르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진정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Dystopia로 만들고 Utopia를 꿈꾸게 하는가?
‘アキラ’에서 세 아이들은 마지막에 자신을 희생하고 새로운 시대의 씨앗의 상징인 카네다와 케이를 세상에 남기고 그전의 세상인 네오도쿄를 같이 파괴한다. Dystopia영화의 스토리구조는 항상 그런 이상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며 끝이 난다. 사람들은 그렇게 Dystopia에서 Utopia의 생성의 가능성을 보고 Dystopia적 미래를 그린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문명이 발전이 인류에게 행복을 주는 하나의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이 착각임을 인간의 문명은 퇴화할 수도 있다는 생물학적 역사관이 Dystopia를 만든 것처럼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러한 점에서 영화를 볼 수 만은 없다.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완전한 Dystopia의 세계가 완벽하게 무너지고 Utopia가 탄생하는 그 거시적 관점의 시작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관객은 현실과 Dystopia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우선 몰입을 하고, 그 속에 숨어있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영웅과 자신 혹은 주변의 누군가로 그 인물을 투영시켜 처음부터 Utopia를 위한다기 보다는 무엇이 그에게 있어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Utopia를 같이 꿈꿔 보는 것에서 의의를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결국 Utipia의 정의는 어느 영화도 예기하지 않는다. Utopia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 생각처럼 거대한 사회의 변화를 이야기하기 보다 상당히 개인적이고 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Dystopia가 자유를 얻지 못하는 구성원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미래상이라 할 때 Dystopia는 그 정의에 따라 두 가지 모습이 있을 것 같다. 영화 속의 그 두 Dystopia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 사회를 Dystopia라 생각하게 되고 무엇을 Utopia의 씨앗으로 생각하는가?
매드멕스2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 사회가 핵전쟁으로 문명이 붕괴된 과거 같은 미래이기에 Dystopia 영화라 생각한다. 과거로의 회귀를 택한 그 사회는 퇴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물학적 역사관에서 Dystopia라는 말이 유래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정관념으로 매드맥스2의 사회는 Dystopia인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의 미션은 핵 전쟁등의 문제가 아니다. 자원 고갈 또한 정말 심각해졌지만 지금의 상황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사회를 정말 Dystopia로 만드는 것은 자유의 상실이다.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언제나 자연과 가까워지는 세상을 꿈꾼다. Dystopia란 그의 자유가 억압되는 상태를 말한다. 매드맥스2에서 요새 안의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는 요새에 자신들을 강금한 형상이 되었고 그저 요새에서 나가는 것, 그저 남쪽으로 가서 바다를 보는 것이 그들의 생명을 건 유일한 목표가 된다. 그 사람들에게 Utopia는 핵전쟁 이전의 자원이 풍부한 세상일까? 그들의 Utopia는 그야말로 그들이 가리키는 엽서 속 같은 세상이고 그곳은 자신들의 자유권이 인정되는 세상이지 핵전쟁 이전의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닌듯하다. 마지막에 소년은 부족장이 된다. 그들은 새로운 자유의 아나키즘 사회를 떠도는 유목민이 되고 자유를 얻음에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생물학적 역사관에서 보면 여전히 그 사회는 Dystopia다. 사실 달라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출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영화를 본 사람들의 만족감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생물학적인 Dystopia의 정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또 다른 축으로 자연과 점점 멀어 진 인류에게 있어 Dystopia는 무질서함이 되기도 한다. 그곳은 ‘アキラ’의 네오도쿄이다. 이러한 Dystopia는 황량한 황야의 매드맥스의 Dystopia와 완전히 다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으로 인간미는 없는 도시 자체가 인간보다 더 큰 무엇으로 인간을 억압하며 그 비대한 뒤뚱거림은 스스로 통제력을 잃은 상태이다. 이러한 도시의 Dystopia는 바벨탑의 전설을 두려워하며 형성된다. 고도의 과학 기술이 주술과 같은 마력을 가지게 되면 과학 본래의 합리성은 감당 할 수 없는 비합리성을 가지고 일명 금단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간은 새로운 영웅이 출현해 이 달려가는 도시에 제동을 걸어주길 원한다. 그 발전한 사회에서 정말 합리적인 세상에서 무당이 출현하고 사회는 ‘アキラ’의 존재를 열망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Utopia는 궁극적으로 컨트롤 가능한 공간이었던 것 이지만 ‘アキラ’는 통제할 수 없는 파괴성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문명이란 이름으로 이러한 원시의 자연성을 야성과 비합리의 공간을 합리라 생각되는 규칙의 공간으로 만들어왔다. 법이 지배하고 규칙이 있는 공간에서 그들은 행복하고 Utopia를 맛본다. 그러나 숨어있던 자연이 합리라고 믿어온 인간의 규칙적 구조와 부딪히기 때문인지 극단의 과학과 문명의 발전은 원시의 자연과 만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사람들은 야만의 사람들을 따로 격리시키며 안정된 통제 속에서의 자유에 행복해 한다. 그들에게 있어 행복함에 대한 이기적 욕구는 무서울 정도여서 민주주의든 전체주의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복인 것이다. 이것이 Utopia라면 우리의 Utopia의 정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이 영화의 Utopia의 씨는 겨우 인류를 다시 출발점으로 돌려준 것이다. 인류의 생물학적 역사관에서 보면 3차 대전 이후 복구한 도시에서 다시 인류는 Dystopia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이 Utopia의 씨라고 역설하고 있다. 과연 그게 Utopia인가? 인류는 또다시 네오도쿄를 만들지 않을까? 통제 가능한 도시를 세우다가 비대해져서 다시 침몰하는 반복 말이다.
그렇다면 Utopia란 무엇인가? 사실 Utopia는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Utopia는 꿈꾸어지는 것이고 그 사람 각각 모두 다르게 가지고 있는 이상향이다. 이상향에 대한 현실적 사회를 가리켜 Dystopia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Dystopia를 형성하는 요인은 검증되지 못한 사회전체가 근거 없이 믿고 있는 관념이며 Utopia는 모두의 마음속에서 다른, 그때그때 다른 것이다. 결국 Utopia는 누군가의 Dystopia이기도 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dystopia는 어떻게 형성되고 그려지는지 살펴보자 한스 제들마이어는 현대미술을 보고 이것은 사회가 비정상적이어서 나타난 병적 현상이고 현대 사회를 ‘고차원적인 정신상태를 희생시켜 얻은 한층 저하된 정신상태의 비대증’이라 정의한다. 재미있게도 현대미술은 그가 걸어왔던 발전의 길을 역행하면서 발전한다. 피카소에서 형이 대상을 닮을 필요가 없이 파괴되었고 마티스에서 색이 자연의 색이 아닌 자신의 색이되고 칸딘스키는 색과 형의 유희만으로 회화를 그린다. 재제 자체는 원시미술처럼 돌아가 헤겔의 생물 계층을 거꾸로 탐색하게 된다. 신에서 인간의 추한 모습으로 추한인간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에 이르면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된다. 이러한 인간은 미래파에서는 영혼이 없는 무기체인 기계와 결합하기에 이른다.‘アキラ’에서 ‘테츠오’는 신처럼 보이다가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 되고 동물과 같이 욕망에만 충실하다가 기계 팔과 결합하고 결국 풍선처럼 부풀어 존재감을 잃어버린다. 인간은 이것을 Dystopia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방향성은 관념에만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 삶에서 우리는 이미 인간성의 끝을 보고 마지막 단계인 무기물과 결합하고 있지 않은가? 카네다와 바이크가 한 몸이 된 것처럼 맥스가 차와, 캡틴이 헬리콥터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Dystopia로 보지 않는다. Utopia는 순간적이고 개인적 꿈이지 이것이 사회가 구는 꿈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Natzi 전체주의다. 이는 누구에게 Dystopia다. 사람에 따라 자유를 아니면 통제를 행복의 조건으로 보는 사람들로 나뉘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언제나 Dystopia가 될 가능성은 있다. 같은 이유, 누구나 Utopia를 꿈꾸지만 이는 누군가의 Dystopia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관념적인 Dystopia와는 한참 거리가 멀 것이다. 생물학적 퇴행과도 거리가 있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미래가 현재가 되면 그 때를 사는 사람에게 있어 Dystopia는 또 다른 세계고 Utopia를 꿈 꾸지 못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과학 발전에 의존해 생기고 사라지는 개념이 아니라 좀더 인간의 판단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SF film about
**관련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1982 年 作, 리들리 스콧 감독
<혹성 탈출 Planet of the apes> 1968 年 作, 프랭크린 J. 샤프너 감독
<혹성 탈출 Planet of the apes> 2001 年 作, 팀 버튼 감독
많은 SF영화가 미래 혹은 과거를 그린다. 지금의 상황과 거의 같지만 단 한가지만(대부분 과학기술에 의해 변화된 것) 달라져 그대로 다른 시대로 외삽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SF는 역사영화적인 면을 띄고 있다. 단 과학기술에 의한 대안 상상 역사인 것이다. 저번 주 주제인 Dystopia에 이어 이번 영화들도 Dystopia를 그리고 있다. <혹성탈출>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유인원들에 의해 압박 당하여 개인의 생존권과 자유권이 압박된 Dystopia를 그린다 인간이 진화상으로 퇴화하는 미래가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종이 더 발전 할 수 있다는 상상의 대안 역사인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과학기술의 발전이든) 목표라는 대의명분에 의해 다른 종, 자연을 희생시킬 때 나타나는 욕심에 의한 Dystopia이다. <블레이드 러너>는 리플리컨트들의 반란으로 인해 무질서한 사회를 감당 할 수 없어 블레이드 러너라는 직업의 리플리컨트 암살자를 두고 그 안에서 자유롭다고 안전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그리고 있다. 인간들은 자신의 안전한 삶을 위해 직업과 급여라는 보상으로 누군가 희생양을 필요로 하고 이 일그러진 영웅은 의무감 사명감을 가지고 인간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개인 내부에서 곧 사명감은 자신이 적으로 싸우고 있는 리플리컨트와 인간의 차이점에 대한 의심으로 바뀐다. 그는 양쪽에서 버림받은 자신에 대한 조소와 불안에 휩싸인다. 자신의 안전 불감증에 휩싸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 어딘가 인공적인 우산아래 들어가 우물 안에서 행복한 인간의 욕심이 부를 인간성 희생에 대한 대안역사이며 Dystopia이다. 결국 인간의 욕심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는 dystopia에 대한 불안이다.
사회적인 불안은 예술에 반영된다.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에 의하면 인간과 그가 느끼는 자신의 주변환경과의 관계가 예술의 형태에 영향을 준다. 자연을 안전한 것으로 보고 그 속에서 만족을 느끼는 인간은 그를 모방하며 재현회화를 만든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낯선 사막에 떨어져 밤이라도 되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환경의 인간은 불안에 휩싸이고 이 불안이 추상을 부른다. 많은 SF영화의 Dystopia는 현실의 불안을 반영한다. 오히려 전쟁 이후에는 SF보다는 회복의 드라마 혹은 삶의 무게나 세대갈등이 주제가 되어 영화가 위안의 역할보다는 메시지 혹은 질문을 던지는 매체가 된다. 그러한 미래라기 보다는 현재를 그리는 영화가 나오지만, 아직 전쟁을 경험하지 않고 그야말로 불안의 상태에 놓이게 그 전쟁은 영화 속에서 먼저 이루어지며 이는 보수주의 성격을 띄게 되면 위안, 미처 인식하지 못한 문제에 대한 소수 혹은 자유주의 적인 성격을 띄면 경종의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서구 국가의 전체주의 국가의 핵무기에 대한 불안은 보수주의적 시각을 만났을 때 007 series를 만든다.
이러한 불안의 대상이 과학기술인 경우 SF영화가 탄생하는데 유전공학, 핵전쟁에 대한 불안은 단골메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원폭이나 고엽제의 피해로 인한 전쟁 이후 유전자에까지 영향을 미친 무기들에 대한 공포는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했던 인간의 비인간적 모습에 대한 불안과 합쳐져 68년 <혹성탈출>을 낳는다. 이 영화의 경우 이러한 경종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반전이라는 수단이 효과적인 역할을 해내었다. 그곳이 지구라는 것을 넘어 미국인들에게 자유의 상징인 여신상이 부러진 채 처박혀 있다는 것은 잘 짜인 Context상에 놓인 충격적이고 직설적인 Visual image message이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며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영화의 과거를 더듬어 가게 되고 그때 자세히 묘사되지 않은 설정이라도 하나하나 빛을 보게 되는 효과를 얻는다. 가령 핵전쟁으로 인한 인간들이 퇴화한 자리에서 유인원들이 진화를 시작했다라는 말 한마디의 설정을 돌아보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는 아예 인간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겨우 형사와 서장정도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인 한 개인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게 하는 방법을 쓴다. 사회가 어떻다고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고 모습 자체도 새로운 방식으로 미래상을 그리고 있어 관객은 거리감을 느낀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일본 문화가 뒤 덮는 고층 빌딩의 비 오는 Dystopia설정이 익숙하지만) 인간의 안전한 세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보이지 않고, 그곳에서 배제된, 그 경계에 서있는 듯한 데커드 개인의 내면 갈등을 관객들은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된다. 소설로 읽는다면 주인공 시점이라기 보다는 철저히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관찰자의 시점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관객은 리플리컨트인 ‘로이’에게 몰입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그러한 점은 데커드에게 몰입이 되어있던 관객이 두려움을 느끼며 같이 도망하다가 건물에 매달려 덜어지기 일보직전에 로이가 못박힌 손으로 그를 잡았을 때 나타난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그의 독백을 통해 관객들은 처음으로 이 영화에서 인간미를 접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더욱 따듯하고 더욱 그립게 느껴지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범인을 잡는 스릴러 혹은 형사물의 이야기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악역인 범인이라 볼 수 있는 리플리컨트들을 비슷한 시간을 투자하여 먼저 보여주고 그들의 불안과 갈등에 대해 공감하게 한 점이다. 특히 타이렐을 죽이는 로이는 세상이 두려워진 인간이 신을 부르다가 신이 죽었다고 선언 해버리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한다. 관객은 이러한 점에서 리플리컨트도 인간과 다를 게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보너스로 마지막 유니콘 장면 등이 추가되면서 데커드가 리플리컨트 일 것이라는 주장이 생기고 감독이 이를 지지하면서 공감을 했던 두 인물과 괴리감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는 또한 보통의 이야기들은 선 악 등의 대립항에 의해 갈등을 만들어 내는데 결국 이 영화의 갈등구조를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관객 내부의 갈등이 이 영화를 계속 곱씹게 한다.
인간들은 대게 상상을 바탕으로 한 첨단 과학 기술을 생각하며 꿈에 부푼다. 그러나 대안역사 영화들은 이러한 꿈이 너무 장밋빛이 아닌가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래야 이야기로써 갈등도 생기고 잘 만든 갈등이 높은 Story-Value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핑크빛 미래를 꿈꾸며 만들었던 인공의 과학기술이 역사적으로 보면 자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인간에게 더 이상 자연이 말을 걸지 않게 했고 인간은 소외와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이제 기계와 인간이 합쳐지는 일도 상상할 정도로 기계, 공학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혹성탈출의 이종간의 평화처럼 자연과 인공이 화해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데커드처럼 괴로워하며 그 세계에서 침전해야 할지 과학을 사용하는 이도 개발하는 이도 품어야 할 문제다.

SF film about
<가타카, Gattaca> 1997 年 作, 앤드류 니콜 감독
<아일랜드, The island> 2005 年 作, 마이클 베이 감독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원래 세상에는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있었다. 이 일자(一者)의 의지가 개별화 원리에 따라 갈라져 우리가 보는 이 표상의 세계가 탄생한다. 결국 우리들은 조그만 욕망의 조각들이다. 일자가 개별 의지들로 갈라질 때 이 조각들의 차이에서 우리가 각자 세상을 보는 각각의 표상의 세계가 탄생하고, 의지들의 차이가 지워질 때 그 세계는 한때 그것을 뱉어 놓았던 존재의 영점(零㸃)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아일랜드에서 클론들은 그들의 본질적인 차이로 인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구분이 되고 하나의 캐릭터가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두가 아일랜드를 가기를 소망하기로 프로그램이 되고 모두의 차이를 지움으로써 그들은 개인이 아닌 그룹이 된다. 결국 차이들을 낳을 때에 세계가 탄생하고 차이들을 지울 때 세계는 사라진다. 사막에 쏟아져 나온 하얀 유니폼을 입었지만 각자 생각이 다른 그 상태에서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꿈은 내가 남과 다른 것을 보고 당황한 개별 자들이 무엇인가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이는 세계의 끝, 영점을 향하는 것이다. 개별 자들은 과연 그 절대적인 것을 자기 안에서 찾는 진정한 자아로의 수행의 결과로 차이를 더 크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인지하는 것이 얼마나 절대적일 수 있을까?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다 보면 완벽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차이를 만들어 나가는 것 조차 하나의 경향으로 묶이다 보면 같아진다. 더 이상 사람들은 나의 숨은 매력을 드러내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남과 구분되지 않는 모습으로 세상에 스며들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 되었다. 그렇기에 화장의 미는 성형의 미가 되는 것이다. Vincent가 만약 성형과 극단적인 생체공학 시술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예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매일 반복되는 camouflage에서 그렇게 그는 존재한다. 그러나 위장이 아닌 변신이 될 때 우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하나의 의지가 Vincent인가? 그는 과연 자신이 되기 위한 의식을 한 것인가? 자신을 지우는 의식을 한 것인가? 우리는 상대적으로 나와 남의 차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인지하고 다른 개별자의 특성을 지우고 일자가 되고 싶어 한다. 내가 꿈을 꾸는 세상이 있다는 것은 현재가 만족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자의 세상에서 무엇인가 되고 싶은 욕망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일자의 세계에서 나는 의미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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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인간은 아픔과 성숙에서 자신이 되어간다. 이 아픔 너무 괴로워 미리 디자인되어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은 그들 자신의 미디어인 몸을 통해 노력을 하는 의지를 배우질 못했다. 그들은 꿈을 꾸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행복은 쉬웠고 결국 가치 없었다. 수영을 하는 형제의 장면에서 디자인된 인간인 Anthon은 그의 형이 또 지게 하는 정도로 수영을 하면 되었다. 그러나 Vincent는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수영을 했다. 세상은 디자인된 인간에게도 힘이 들 수 있다. 미리 백신을 맞고 저항력을 키우는 준비를 하는 단계가 없이 1등만이 중요한 스포츠의 세계에 던져진 Jerome은 그의 패배를 노력의 차이로 보지 못하고 이미 결정 난 자기보다 더 뛰어난 유전자의 승리로 보게 된다. 수영은 그의 생의 전부였고 그렇기에 이미 결정 난 싸움에서 수영은 그에게 무의미 해지고 그는 달리는 차에 몸을 던진다. 그는 미래로 빨리 효과적으로 가기 위해 디자인된 유전자이지만 그의 삶은 2등을 했던 과거에 머물러있다. 그러나 Vincent는 포기 하지 않고 꿈을 꿀 수 있었고 그것이 Jerome은 포기 포기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만들어낸다.
두 영화는 상당히 애매하게 다르다. 어떤 삶에서는 모두가 개별자가 되고 싶어하고 모두가 개별자가 된 어느 삶에서는 다시 일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생체공학적 존재들은 일자와 개별자의 중간에 애매한 위치에 서있다. 돌아간다는 것, 마음속에 안정을 가져다 줄 회귀는 사람마다 의미를 달리한다. Vincent에게는 오히려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를 버림으로써 생기는 에너지가 우주로의, 수영을 하는 건너편으로의 회기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링컨에게는 자신에 삶에 대한 자신의 소유를 얻기 위한 끝없는 투쟁,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차이 만들기의 개별화가 자기로의 회기다. 하나는 영점으로 회귀하는 것이고 하나는 개별 자로의 회귀를 꿈꾸기에 나타나는 차이다. 그런 면에서 회귀라는 것은 상당히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어쩔 수 없이 꿈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꿈이란 부적격자의, 불만족자의 특권이다. 아픔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일자와 개별자의 두 갈래 길에서 꿈이 있는 사람에게 꿈은 방향성을 제시해주지만 꿈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길은 풀 수 없는 난제다. 그 꿈이 얼마나 ‘자신 스러운’ 스타일의 것인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퍼맨 리턴즈, Superman returns> 2006 年 作, 브라이언 싱어 감독
<수퍼맨, Superman> 1978 年 作, 리차드 도너 감독

<금지된 행성, 금지된 세계, 금지된 혹성, Forbidden Planet>
1956 年 作, 프레드 M. 윌콕스 감독
<솔라리스, Solaris> 2002年 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신체 강탈자의 침입, 우주의 침입자,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78年 作, 필립 카우프만
<제3종 근접조우,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1977年 作, 스티븐 스필버그
인류는 우주상에 자신들이 유일하지 않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왔고, ‘외계’와 자신들 외의 미지의 지적 생명체인 ‘Alien’에 대해 두려움과 호기심을 키워왔다. 이 호기심과 걱정은 다양한 모습의 Alien과 인간의 조우를 그린 많은 SF영화들을 통해 시각화 되어왔다. 47년 로스웰 사건이 기밀에 붙여지자 각종 근거 없는 소문들을 바탕으로 지구를 방문(혹은 침략)하는 Alien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았다. 이 상상을 구체화 시키면서 인간은 지구로 찾아올 수 있을 정도의 발전된 과학기술을 가진 타자에 대한 상대적으로 부족한 정보 때문에 불안해졌다. 결국 많은 SF영화는 Alien의 지구침략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기존의 인류의 문명을 타자가 파괴한다라는 개념을 봤을 때 Alien의 지구침략은 Monster film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Monster와 Alien은 어떻게 다르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 존재들인가? Monster 의 경우 내생적 존재다. 나의 어두운 다른 면의 형상화다. 낯선 존재이긴 하지만 지구 생물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간보다 지적으로 위대한 존재가 아니며 사고로 갑자기 생긴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지 못한 인간의 지적 능력 혹은 문명의 힘을 통해 제압하게 된다. 또한 Monster는 나의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약점을 상대적으로 쉽게 알 수 있고, 이 Monster와 사투하고 승리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정화하는 의식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Alien은 정말 외생적인 타자이기 때문에 미지의 대상이며 유비를 통해 존재를 이해할 수가 없다. Alien은 그래서 두렵고 또한 궁금한 존재이다. 그들은 기존 생물학적 특성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상상의 산물일 수 있다. 게다가 Alien을 외계 지적 생명체라 부르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이성과 지성을 제일 두려운 것으로 그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Alien film은 Alien과 인간과의 차이를 통해 인간성을 다시 확인 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적으로 열악하다고 느껴지는 불안한 과학기술로는 고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진 Alien을 상대 할 수 없으며 결국엔 인간이 기본적으로 내제하고 있는, 또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인간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드러내려 한다. 그래서 많은 Alien film의 경우 따듯한 인간성을 가지지 못한 1차적 욕구인 생존만을 생각하는 냉정한 Alien이 인간성을 파괴하려는 모습을 그린다. 영화 <신체강탈자의 침입>의 경우 외계인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돌려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인간은 외계식물의 숙주가 되어 신체를 내어주고 영혼을 상실 당한다. 실제로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멀쩡하게 남아있는 강탈 당하는 신체가 아니라 몰개성화로 인한 주체성 상실과 영혼 강탈이다. 영혼을 강탈당한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법은 잠을 자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은 실제 현대의 거리와 다를 것이 없다. 이 모습을 새삼 섬뜩하게 그림으로써 감정이 없는 인간은 영혼이 없는 것과 같고, 잠을 자지 않고 휴식을 즐길 줄 모르는 인간, 노동력으로만 인지되는 인간성 상실의 현대인을 객관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 영화에서 궁극적인 적은 외계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관객은 특수 효과 등으로 드러난 외계인의 모습을 보지 않으면서 인간이 스스로의 모습에서 낱섬과 공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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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외계인은 극단적인 전형적 캐릭터인가?
과학기술의 경이로움을 알고 있는 인간에게 발전된 과학기술을 가진 외계의 문명은 상상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은 이 개념에 익숙한데, 인간이 신을 인지함에 있어서 신이란 전지전능한 존재로 천국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말한다. 이 개념을 믿음으로서 종교의 개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상에서) 눈앞에 존재하고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인 외계인을 인간은 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이들이 신이 되지 않게 위해서 인간은 외계인의 존재를 첫째, 도덕성을 상실하거나 둘째, 외계인 스스로가 그들과 우리가 같은 피조물인 하위 개념의 존재로 동지고 친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을 가지게 했다. 첫째 적으로서의 외계인과 인간은 소통이 필요 없으며 본능적으로 적임을 느낀다. 인간은 선함과 아름다움의 개념을 섞을 때가 있다. 따듯한 인간애가 드러나는 이야기를 선담이 아닌 미담이라 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성이 없는 외계인은 선하지 못한 것, 선하지 못한 것은 추한 것으로 그려져 본능적으로 적으로 인지된다. 그렇다면 그들의 침략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신들의 침략역사에서 이 이유를 찾았고 대부분이 생존을 위해서 혹은 노동력이나 자원의 착취를 위한 침략을 그리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번째 친구로써의 외계인은 스필버그의 영화세계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이 외계인과 사회적 관계 즉,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존재한다. <제3종근접조우>에서는 두 가지 방법의 커뮤니케이션 법이 등장한다. 영화 <미션>에서 문명과 언어를 초월하는 가브리엘의 오보에와 같은 음악이 그 첫 번째고 이는 인류 대 외계 문명의 대화법이다. 두 번째로 좀더 개인적인 친밀함은 텔레파시로 전달된다. 주인공들은 UFO를 목격하고 어떠한 이미지에 강렬하게 사로잡힌다. 진심이 통한 존재들이 이미지를 통한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에서 그려진 미스터리에 대한 광적 집착을 보이는 주인공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가정적인 아버지가 자기 가족을 버리고 마치 유치원 아이들 같은 외계인들에게 둘러 쌓여 UFO에 탑승하는 모습은 마치 외계인들의 아버지 혹은 추앙 받는 신 같아 보인다. 친구로써의 외계인을 그린 영화는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겪는 자신 주변의 사회적 관계의 형성과 인지를 범지구적 차원에서 인류가 경험하는 것처럼 그린다. 모든 인류가 하나된 모습에서 유대감을, 인간성을 타자와 나누는 과정에서 강화하는 인간성에 대한 재확인을 가짐으로써 감동을 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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