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을 힘으로 Talk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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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보며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습득하는 편식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편식은 결과적으로 균형의 파괴와 소멸을 낳는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되어야 하듯, 낯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열어둘 수 있어야 한다. 즉, 인문학도가 과학책을 읽고 경제인이 시를 읽고 정치가가 음악을 이해할 때 비로소 사회는 균형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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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상공으로 가늠할 수 없는 인간성의 형성은 과거나 현재에나 글을 통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인간은 언어적 동물이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자리매김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화를 익히고 언어와 친숙해 지는 것을 거부함은 곧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이라 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그 자신이 인간학자 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Landmann의 말처럼,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랑 무엇인가."라는 인문학의 근본 질문은 직업 신분에 관계 없이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하기에 그에 답하려 노력하는 것은 삶의 기본적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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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정해진 의학서, 법학서만을 탐독했더라면 훌륭한 전문가는 될 수 있었을 지언정,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얻기 어렵고도 소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정답과 승리만을 가르쳐 주던 사회와 그 사회의 교육 시스템에서 한 걸음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 이것이 내가 나의 경험을 행운이라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진정한 지식과 교양은 힘을 기르는 도구적 기술이 아니다. 그보단 권력의 힘에 위축되고 좌절할 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나 개인의 가치와 존업성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 이것이 앎의 진정한 소명이 아닐까?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中 최영주 박사가 쓴 서문에서 발췌
무엇이든 '쓸모'를 따지는 것이 습관이 되었었다. 당장 이 수업은, 이 책은, 이 사람은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실리가 되는가가 선택의 기준이 되어버렸었다. '쓸모'의 노예로써의 삶은 주체성의 부족으로 인한 답답함, 열정의 상실을 가져왔다. 내게 무엇이 쓸모가 있을것이라는 것은 내개 어떠한 미래를 주고 싶다는 인간의 무지한 욕심이었다. 나는 쓸모의 망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었다.
왠일인지 나는 커더란 모험심으로 나에게서 벗어나 다른 것에 몰입하고 싶어도 결국 나를 도구로 인간을 이해하는 소심한 인간학자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초심은 가상의 쓸모를 사라지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가장 순수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쓸모라는 확률게임의 노예가 되길 자처하며 세상을 판단하다 보면 가두어진 본성적 나만 생겨날 뿐인 것이다. 이러한 기준이 생기면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가치를 세우며 자신을 끊임없이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많은 시간을 나의 과거 선택이 옳을 수 밨에 없다고 합리화 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초심의 칼이 기준이 되어 줄테니 스스로를 조금씩 덜어내 몸을 가벼이 할 때인 듯 하다. 이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충만해 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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